추궁의 시간, 면피의 시간 / 최혜정

최혜정 2022. 11. 3. 1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침햇발][이태원 참사][아침햇발]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역 출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이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최혜정 | 논설위원

최근 공개된 경찰청 정보국의 ‘정책참고자료’를 보면, 이태원 참사가 ‘정부 책임론’으로 튈 것을 극도로 경계한 정부 여당의 인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문건은 진보 성향 단체들이 “세월호 사고 당시 정부의 대응 미비점을 상기”, “정부 성토 여론 형성에 주력할 것” 등의 진단을 내놨고, 정권 퇴진 운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경찰력 부재 비판을 “선동성 정치적 주장”으로 규정하고, 국민의힘이 참사 직후부터 “추궁이 아닌 추모의 시간”(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슬픔을 당파적 분노로 전도시켜서는 안 돼”(권성동 의원) 등 진상 규명 요구를 정쟁으로 매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겼지만, 지난 닷새간 윤석열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준 모습은 ‘발뺌’과 ‘선긋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6명의 목숨이 국가의 부재 속에 스러졌는데도, 지금껏 ‘내 책임’ 혹은 ‘정부 책임’을 언급한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는 한명도 없다. 참사 직후 재난 안전 총괄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이상민 장관은 경찰·소방인력 배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예년보다 많은 경찰을 배치했다면서도 실제 질서 유지 인력은 지구대 소속 30여명이 전부였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안전 대책에 손 놓고 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원인 파악이 먼저라는 취지로 답해 공분을 자아냈다. 그나마 지난 1일 이들이 잇따라 사과에 나섰는데, “무거운 책임감”을 언급했을 뿐 실질적 책임은 진상 규명 뒤에 밝혀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사과는 112 녹취록 파장을 줄이기 위한 선제적 조처로 보인다. 한 기관장의 측근은 “(사과를) 우리 마음대로 하지는 않았다”고 해 모종의 ‘지시’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정부가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 역시 재난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정부의 관리 책임을 희석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애도만 하고 ‘가만히 있으라’던 집권 세력의 요구는 지난 1일 오후 참사 직전 접수된 112 신고 내용이 공개되면서 힘을 잃었다.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사전·사후 부실 대응 사실이 잇따라 공개됐고, 경찰은 참사 원인을 규명하겠다며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서울경찰청 등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경찰청 특별감찰반은 3일 이태원 관할 경찰서인 용산경찰서장과 112 상황관리관의 늑장 보고 책임을 물어 특수본에 수사를 의뢰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의 “현장 대응 미흡” 언급이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10만명의 운집이 예상되는 행사에 왜 통제 인력을 미리 배치하지 않았는지, 경력 지원 요청은 왜 묵살됐는지, 보고 체계는 왜 붕괴됐는지 등 ‘윗선’의 문제는 가려지고, 일선 실무자들만 희생양이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정 총책임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공직자들은 ‘덤터기’를 쓸까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거나 떠넘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번 참사가 인재라는 점이 확실해진 만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는 대통령의 사과는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대통령실까지 포함한 성역 없는 진상 규명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112 녹취록을 보고받은 뒤 ‘격노’했다고 전해지면서, 진상 규명의 방향은 경찰, 특히 일선 직원들의 책임으로 방향이 잡히는 추세다. 이상민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지만, 윤 대통령은 희생자 분향소 조문에 연일 이 장관을 대동하며 신뢰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실 안에서는 ‘사과하면 밀린다’는 정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경찰청의 ‘정책참고자료’ 맨 뒷장에는 “대체로 사고 발생 2~4일 ‘정부 대처, 사고 원인’ 등에 관심이 고조되다 정부의 중간수사 결과 또는 재발 방지 대책 발표 등을 계기로 보도 감소”라고 적혀 있다. 정부는 애초 7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여론의 관심이 사그라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참사의 원인은 명확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일을 하지 않아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윤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자 문책, 재발 방지책이 뒤따라야 한다. 국민들이 슬픔과 분노를 품고 지켜보고 있다.

idu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