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머시브, 액티브 공연의 화려한 귀환
극과 무대, 그리고 객석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며 관객들을 극의 방관자가 아닌 극 속 인물로 자연스럽게 초대하는 공연이 있다. 관객 참여를 콘셉트로 하는 이머시브(immersive: 몰입하는) 공연과 함께, 화려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액티브한 공연들이 2022년 하반기 국내 무대를 찾았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넘치는 에너지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공연들이다.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이란? ‘몰두하다’, ‘몰입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이머시브(immersive)’에서 출발한 장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들이 공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몰입할 수 있는 형식의 공연을 말한다. 관객이 일종의 작품 속 요소로 등장하는 셈. 국내 공연계에서도 2010년대 중반부터 확대되고 있다.
▶ 폭발하는 에너지 퍼포먼스극, ‘2022 푸에르자 부르타 웨이라 인 서울’
빠르게 달리는 트레드밀 위에서 종이로 된 벽을 부수는 남자가 있다. 이 장면만으로 보는 이들에게 시원한 쾌감을 건네주는 극, 아트 퍼포먼스 ‘푸에르자 부르타 웨이라 인 서울’이 지난 2018년과 2019년 공연에 이어 올해 3년 만에 귀환 소식을 알렸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대표적인 ‘인터랙티브 퍼포먼스(Interactive performance)’인 ‘푸에르자 부르타’는 지난 2019년 젊은 세대들에게 ‘인스타 성지’로 꼽히며 메가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제목인 ‘푸에르자 부르타’는 스페인어로 ‘잔혹한 힘’이라는 뜻. 극은 도시의 빌딩 숲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모티브 삼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슬픔, 절망부터 승리, 순수한 환희까지 다양한 감정을 퍼포먼스로 표현한다.
특설무대 중앙에 관객들이 선 채 막이 오른다. 난타로 시작된 극은 이내 오감을 자극하는 공연 장치와 화려한 특수효과, 음악을 배경으로 한 배우들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들이 각 섹션별로 펼쳐진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낸다. 종이상자로 쌓인 벽을 부수며 자유로운 감각을 역동적으로 펼쳐내는 ‘푸에르자 부르타’의 대표적인 장면 ‘꼬레도르CORREDOR’부터,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위치한 수조 안에서 여러 배우들이 헤엄치고, 수조를 두드리고 뛰어다니는 ‘마일라MYLAR’, 타워 위 특수 제작된 박스를 신나게 부수는 축제의 한 장면인 ‘무르가MURGA’ 등 작품의 독보적인 퍼포먼스와 함께, 올해 시즌에는 새로운 장면 ‘라그루아LA GRUA’가 추가돼 작품성을 높였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최여진이 함께 해 몽환적이면서도 황홀한 분위기를 선사하고,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메인 댄서 은혁은 특유의 활기찬 액팅과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또 다른 매력을 전한다. ‘2022 푸에르자 부르타 웨이라 인 서울’은 2022년 12월26일까지 잠실종합운동장 FB씨어터에서 펼쳐진다.
▶ 4년 만에 돌아온 비밀스러운 공간, ‘금란방’
2018년 초연 당시 뜨거운 호평을 받으며 많은 팬들을 양산한 ‘금란방’이 4년 만에 돌아왔다. 거기에 공연 형식이 ‘이머시브 공연’으로 새롭게 모습을 바꾸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더해지며 팬들이 일찌감치 극장을 찾고 있다. ‘금란방’은 금주령이 시행된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 당시 있었을 법한 밀주방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유쾌한 소동극이다. 연애소설 듣는 재미에 푹 빠진 조선 시대 왕. 책 읽어주는 신하 ‘김윤신’은 지루함을 호소하는 왕을 위해 사람을 홀리듯 소설을 읽어준다는 도성의 유명한 전기수(조선 후기 소설을 읽어주던 낭독가) ‘이자상’을 찾는다. 그는 부녀자들만 간다는 다원 ‘금란방’에 딸의 매화 장옷을 훔쳐 입고 몰래 길을 나선다. 김윤신의 딸 ‘매화’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식을 앞두고 힘들 때마다 믿고 따르는 이자상의 소설을 들으러 금란방으로 향하고, 그녀의 몸종 ‘영이’는 주인아씨가 전기수만 쫓아다니자 걱정에 매화의 정혼자인 ‘윤구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전달한다. ‘매화 장옷을 입고 있을 테니 모월 모일 술시에 금란방에서 볼 것.’ 한편 밀주단속 특별수사대 팀장인 ‘윤구연’은 이 쪽지가 그저 밀주단속제보인줄로 착각하고 금란방으로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부녀자들이 마시고 있는 차의 정체가 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금주령이 시행된 시대에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 밀주방(금란방)에서는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전개와 스토리가 벌어진다. 대본과 음악 등 대대적 수정을 거친 이번 재연 무대는 부녀자들이 억압받았던 관습과 통념을 깨고 자유롭게 꿈꾸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주제를 더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이번 재연에는 김태형 연출이 새롭게 합류했고 기존 극장형(프로시니엄)을 이머시브 공연으로 확장시켜 극의 묘미를 더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람자인 관객을 밀주방에 찾아온 ‘손님’으로 설정해 관객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공연에 참여하도록 설정했다. 또 라이브 밴드와 클럽 디제잉의 사운드를 접목한 음악은 현장감을 더한다. 이번 시즌에는 서울예술단의 김건혜, 백현, 최인형, 송문선, 이혜수, 김용한이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르며 더욱 깊이 있는 연기와 공감을 끌어내고, 여기에 서울예술단 단원들이 합류해 다채로운 조화를 보여준다. 예매 전 팁을 덧붙여 본다. 평소 외향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면(MBTI 중 E로 시작하는 사람) 무대석을, 외향인(MBTI 중 I로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일반석을 주로 선호한다고. 또 극 중 분위기와 어울리게 드레스코드를 입으면 충분한 재미를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조선 시대 비밀스러운 공간, ‘금란방’에 적극 빠져들고 싶다면 참고해두자. 2022년 11월13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서울.
▶ 오감을 충족시키는 이머시브 다이닝, ‘그랜드 엑스페디션’
“경이로운 장소에서 훌륭한 음식을 먹었으며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났다.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londontheatre1’), “열기구와 프로젝션의 마법을 통한 세계일주”(-‘WhatsOnStage’) 마치 근사한 여행지를 찾은 여행객들의 평을 받은 듯한 극이 있다. 지난 9월 말, 국내에 첫 상륙한 ‘그랜드 엑스페디션’의 이야기다. 극은 세계를 누비는 열기구에 탑승한 것처럼 영국, 일본, 브라질, 시베리아를 비롯해 우주의 디저트까지 즐길 수 있는 ‘이머시브 다이닝’(‘이머시브 시어터’와 ‘파인다이닝’ 형태를 결합한 콘텐츠) 공연이다. 이머시브 극과 파인다이닝과의 결합?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조합이다. 부모님 세대의 디너쇼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들은 보다 젊고, 액티비티하다. 이머시브 다이닝은 최근 몇 년 새 영미 문화권을 중심으로 각광받으며 트렌디하게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장르다. ‘그랜드 엑스페디션’의 경우 영국의 대표적인 이머시브 다이닝 브랜드로 꼽히는 ‘GINGERLINE’의 작품으로, 베스트 셀러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비롯 80권 이상의 작품을 발표한 ‘모리스 센닥’과,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 일주』와 같은 소설을 집필한 ‘쥘 베른’의 작품에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그만큼 감각적인 디자인의 세트, 여행의 설렘을 그대로 전달할 열기구 테이블, 그리고 환상적인 영상을 시청각 자료들로 구성돼 있다. 국내 ‘그랜드 엑스페디션’에서는 2020년 미쉐린 가이드 1스타 레스토랑으로 선정, 3년 연속 1스타를 유지하고 있는 레스토랑 Evett(에빗)의 쉐프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가 참여했다. 그야말로 음식, 예술, 여행 등을 충족시키는 오감 체험의 극인 셈.
국내 ‘그랜드 엑스페디션’은 약 2시간 동안 관객들을 모험지로 초대한다. 영국, 일본, 브라질, 시베리아, 우주 등 모험지가 바뀔 때마다 관객들에게 간단한 설명이 따르고, 배우들 역시 설정에 맞춘 연기와 액션을 취한다. 관객들은 때론 실제 모험가가 되기도, 외국의 이색적인 식당에 온 손님이 되기도 한다. 열기구 테이블 주변을 넘나드는 배우들은 순식간에 관객들을 극의 중심으로 이끌어 몰입감을 더한다. 동시에 또 다른 관객들은 식사를 하며 이러한 모습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이 극의 가장 큰 매력. 이곳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환영한다. ‘새로운 트렌드 경험이 재미난 사람’,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은 사람’, ‘도전을 즐기는 사람’. 혼자 온 손님들도, 가족들과 함께 온 관객들도 충분히 극에 어울릴 수 있어서, 색다른 경험을 원하고 여운이 남는 공연을 원한다면 제격이다. ‘그랜드 엑스페디션’은 2023년 3월1일까지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 ‘태양의서커스 뉴 알레그리아’
아트서커스 그룹 ‘태양의서커스’는 세계적인 명성에 걸맞게 그 이름 자체만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1984년 창립 이후 40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커스 공연으로 꼽히는 ‘태양의서커스’의 대표작이자, 시대를 초월한 고전 작품 ‘뉴 알레그리아’가 2022년 한국에서 막을 올린다.
한때 가장 찬란했던 제국에선 왕을 잃은 후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존의 귀족 세력과, 희망과 변화를 추구하는 젊은 세력 사이의 권력 투쟁이 번진다. 권력을 잃고 싶지 않은 왕국의 어릿광대 ‘미스터 플뢰르’부터, 오만한 귀족들과 낡은 질서에 도전하는 ‘브롱크스’, 사후 세계에서 온 님프들과 천사들이 등장한다. ‘뉴 알레그리아’는 단순히 아찔한 곡예만을 선보일 거라는 서커스의 편견을 지우는 탄탄한 스토리와 ‘아크로폴’, ‘저먼휠’, ‘에어리얼 스트랩’, ‘파이어 나이프 댄스’ 등 흥미진진한 곡예, 초현실적인 의상, 생동감 넘치는 세트가 더해져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1994년에 초연된 ‘알레그리아’(스페인어로 ‘기쁨’, ‘환희’, ‘희망’)는 19년이 넘는 투어 기간 동안 전 세계 40개국 255개 도시에서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매료시킨 작품이다. 지난 2019년, ‘알레그리아’ 탄생 25주년을 기념해 무대 연출, 음악, 곡예, 세트, 의상, 조명, 분장 등 모든 구성 요소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초연 당시의 감동을 재연되도록 한층 업그레이드한 ‘뉴 알레그리아’를 새롭게 선보였다. 2층 규모의 왕국 세트와 975m의 왕관 모형은 압도적 규모를 자랑하고, 수작업으로 만든 96벌의 의상과 캐릭터별 각기 다른 30여 가지의 메이크업은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다. 또한 이번 투어에는 전 세계 19개국 53명의 아티스트들 출연해 고난도의 곡예, 텀블링, 아크로바틱과, ‘플라잉 트라페즈’를 새롭게 도입했다. 무엇보다 팝,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생동감 넘치는 ‘알레그리아’ 음악은 오랜 시간 ‘태양의서커스’를 사랑해온 팬들에게 변하지 않는 감동을 선사한다. ‘태양의서커스 뉴 알레그리아’는 2023년 1월1일까지, 잠실종합운동장 내 빅탑에서 공연된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3호 (22.11.0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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