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독재자' 욕해봐" 조지아는 러 피란민에 사상검증중

전명훈 2022. 11. 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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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곳곳 러시아 비방…합격점 받아야 술집 입장
14년 전 패전 굴욕감…"그래놓고 우리가 탈출로냐"
조지아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지 집회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정치적 탄압이나 강제 징집 등을 피해 조지아로 피신한 러시아인들이 현지 주민들의 얼음장 같은 적대감을 맞닥뜨리고 있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거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한 욕설이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내용의 스프레이 낙서가 널려 있다.

러시아 손님을 걸러 받는 주점도 등장했다. 이 주점은 러시아인의 경우 자국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입장을 허용한다. '제국주의자로 세뇌된 러시아인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 주점의 원칙이다.

'푸틴은 독재자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한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다', '러시아가 조지아 영토 20%를 (무단) 점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는 항목에 모두 체크(✓)표시해야 주점 입장을 허용해주는 식이다.

목록은 길다. '주문할 때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겠다', '루블화로 결제하지 않겠다', '취해서 정치논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항목도 있다. 읽어보지도 않고 모든 항목에 동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입장하려면 이 항목은 체크하지 마시오' 같은 함정도 있다.

"'루스키 보에니 코라비 이디 나 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항목도 있다. 우크라이나어로 "러시아 함선은 꺼져라"라는 뜻이다. 전쟁 첫날 우크라이나 수비대원이 러시아 흑해함대 기함 모스크바함을 향해 내뱉은 말로,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을 상징하는 '명언'이 된 지 오래다.

점주는 2일 워싱턴포스트(WP)에 "러시아인들은 불편함에서 벗어날 특권을 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동의서를 도입한 4월 이후 이 모든 항목에 제대로 동의하고 입장한 러시아인은 2천5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동의서를 보고 돌아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점주는 말했다.

러시아인 입장 심사하는 조지아 주점의 동의서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트빌리시의 한 숙소에 머무는 한 러시아 형제는 트빌리시 현지의 적대감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아주 지옥을 만들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인이 어떤 마음이었을 지 알 것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지아는 러시아인들에게 '인기 피난지'다. 워낙 러시아인이 많이 몰려와 수도 트빌리시의 월세가 올해 들어서만 80% 상승했다. 1년 동안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러시아인 입국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입국한 러시아인에게 정작 눈을 흘기는 복잡한 태도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을 치른 앙금이 여전한 것이 원인이다.

러시아와 조지아는 2008년 전쟁을 치렀다.

친(親) 서방 노선을 걷던 조지아가 자국 내 친러시아 분리주의 지역을 먼저 공격했다가 러시아군의 반격에 밀려 5일 만에 수도를 방어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측이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등을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두 지역은 조지아 본토와 사실상 분리돼 있다. 당시 일부 조지아 시민들은 전쟁을 피하다가 가족과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러시아군이 허용할 때만 가족 간 상봉이 가능하다고 한다.

조지아 국경에 몰린 러시아 차량 행렬 [TASS=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전쟁을 기억한다는 23세 여성은 "한밤중에 헬리콥터 소리가 울리는데 가족들이 날 깨워서 짐을 싸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며 "러시아인들이 우리를 탈출로로 선택한다니 정말 짜증 난다"고 말했다.

분리주의 지역 접경지역에서 러시아 측의 엄중한 감시 속에 살고 있다는 한 노파는 WP에 "러시아는 엄청 크잖아. 땅은 충분하지 않나"라며 불편을 호소했다.

결국 조지아는 서방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러시아를 자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실제로 조지아는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고, 유럽연합(EU)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인 무비자 입국도 유지했다. 푸틴의 반대파 인사 일부는 조지아 입국이 거절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지아의 한 국회의원은 "우리는 실용적이고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장 당시 남오세티야에서 수도 근처로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 중 일부가 트빌리시 근처에 정착촌을 꾸렸다. 이곳 주민인 29살 남성은 여전히 러시아인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다. 하지만 정착촌에는 푸틴을 욕하는 낙서도, 우크라이나 국기도 없었다고 WP는 전했다. 남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우리 마을은 조지아에서 러시아인들이 절대 발도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라고 말했다.

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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