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참사 3일 뒤에야…책임 회피로 버티는 한국의 공직자들
국민 안전을 관리해야 할 공직자들
책임지는 발언 없이 해명·회피로 일관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발생한 압사 사고로 사망자 156명, 부상자 187명(3일 오전 11시 기준)의 희생자가 나왔다. 국민은 희생자를 애도하면서도 공직자들의 말과 행동에 이목을 집중했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을 관리하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책임 회피’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고, 이태원이 포함된 서울시와 용산구의 수장도 3일 만에 희생자들을 향해 사과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발언을 간추려 사고 이후 과정을 정리했다.
“압사당할 거 같아요”…골목에 비명 울려 퍼진 10월29일
지난달 29일 밤 10시15분께 소방청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호텔 근처 골목에서 압사로 추정되는 사고 신고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소방청은 “핼러윈데이로 다수 인파가 몰려 발생한 압사 사고로 추정된다. 현재 심정지(CPR) 환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피해 인원을 확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사고를 보고받은 뒤 서면 브리핑을 통해 “행정안전부 장관을 중심으로 모든 관계부처 및 기관에서는 피해 시민들에 대한 신속한 구급 및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경찰청, 지방자치단체 등은 전국 일원에서 치러지고 있는 핼러윈 행사가 질서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행사장에 대한 안전 점검과 안전 조치를 신속하게 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행정안전부와 소방당국은 이날 밤 11시15분께 소방 인력을 현장에 급파한 뒤 차례로 대응 수준을 높여 1시간 여 만에 3단계 대응 발령까지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권과 강원권에서도 119 소방차를 급히 징발했다. 유럽 순방 중이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대형 안전사고 발생 보고를 받은 뒤 순방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사망자 150명 넘어선 ‘참사’…국가 애도기간 선포된 10월30일
지난달 30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최우선 사안은 환자 후송 및 구호이며, 피해 국민의 신속한 의료 기관 이송 및 치료”라면서 “앰뷸런스 이동로를 확보하고 이를 위한 교통 통제 등 필요한 조치를 바로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오전 9시48분께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실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선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발생했다”며 “정부는 오늘부터 사고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국정 최우선 순위를 본 건 사고 수습과 후속 조처에 두겠다”고 밝혔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정부합동 브리핑에서 ‘당일에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소방이나 경찰이 배치됐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예년의 경우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며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라고 말해 공분을 샀다.
관할 행정구청인 용산구청은 외부 연락을 끊고 있다가 사건 발생 18시간 만인 오후 5시에 서면 간접 입장문을 냈다. 여기엔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시거나 제언, 정보가 있으면 언제든 전화주시기 바란다”고 적혀있었지만 <한겨레>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도 받는 이는 없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연락이 닿은 건 2시간 뒤였다. 박 용산구청장은 ‘입장문에 관리감독 책임에 대한 언급도, 예방을 못한 것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는 질문에 “영혼 없는 사과보단 어떤 사전 준비를 했고, 실제로 잘 시행이 됐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흰 국화 앞에 선 공직자들…그러나 사과는 없었던 10월31일
서울시는 지난달 31일 서울광장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이날 오전 9시27분께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는 합동분향소를 찾아 약 20초 동안 묵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조문 뒤 ‘전날 발언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같은 생각이냐’라는 질문에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다시는 이와 같은 대참사를 면할 수 있기 때문에 섣부른 예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취지”라고 답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용산구청의 책임론에 대한 질문에 그는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 작년보다는 (인파가) 많을 거라고 예측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많을 거라곤…”이라며 선을 그었다.
공직자 목소리에 빗발친 비난...‘심심한’ 사과 이뤄진 11월1일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참사 3일 만인 1일 입장문을 내 “구청장으로서 용산구민과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이태원의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용산구의 책임론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내놓은 첫 사과문이다. 박 구청장이 언급한 ‘송구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표준국어대사전)이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3일 만에 ‘눈물 회견’을 열었다. 그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서울특별시장으로서 이번 사고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면서도 책임론엔 “수사를 해봐야 한다”고 선을 긋거나, 내부 감사를 통한 책임 규명에 대해서도 “감사가 어렵다”라며 물러섰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책임 회피 발언으로 논란이 되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이 있음에도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국민안전을 책임지는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간담회 답변 도중 농담을 하고 웃음까지 지어 비판이 일었다. 그는 “통역 관련 문제가 있어 죄송하다”는 공지를 들은 뒤 “이렇게 잘 안 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며 웃었다. 앞서 기자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흉내 내 말장난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정안전부가 지난달 30일 각 지방자치단체에 사고 이름을 ‘이태원 사고’로 통일하고, ‘피해자’ 대신 ‘사망자’ 혹은 ‘사상자’라고 쓰라는 공문을 내려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행안부는 객관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차원이라고 했지만, 150명 이상이 숨진 대형 참사의 명칭을 사고로 쓰라고 지침을 내린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황인솔 기자 breez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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