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해봤자 안 팔려”… 흥국생명發 금융사 영구채 시장 ‘흔들’
5년물로 인식되던 한국 영구채… 30년물로 인식 변화
금융사, 국내 이어 해외 채권발행도 어려워 자금조달 비상
레고랜드 사태로 얼어붙은 채권시장이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조기상환 콜옵션 미행사로 더욱 경색됐다. 평판이 중요한 금융사에서 이례적으로 중도상환(콜옵션)을 하지 않자, 그 여파가 전 금융사로 미치고 있다.
신종자본증권은 주식과 채권 성격을 동시에 지닌 하이브리드 증권이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계산할 때 기본자본으로 잡혀 금융사의 자기자본 확충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후순위채권으로 금리가 높은 편이며 콜옵션이 가능하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오는 9일 조기상환일이 도래하는 5억 달러(약 7080억원)의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행사를 연기하기로 했다. 당초 3억 달러의 신종자본증권과 1000억원의 후순위채를 신규로 발행해 기존 발행분을 상환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금융시장 거래 위축으로 차환을 위한 채권 발행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자 조기상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흥국생명만을 두고 볼 때 이 결정은 합리적이다. 최근 채권시장 경색과 글로벌 금리 인상기에 금리를 높여 새로운 채권을 발행하는 대신 투자자들과 맺은 금리인상(스텝업) 조항에 따라 기존 신종자본증권의 이자를 기존 4.475%에서 6.74%로 올리고 콜옵션 행사를 연기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러나 시장 전체로 보면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는 국내 금융사가 발행하는 영구채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통상 국내 금융사가 발행하는 신종자본증권의 경우 30년 만기, 5년 콜옵션의 조건을 건다. 외국 금융사와 달리 30년 만기를 채우지 않고 발행 5년 후 콜옵션을 행사해 채권을 조기상환하는 관행이 있다.
이에 따라 역외 채권시장에서는 국내 외화채권을 30년물 대신 5년물로 인식해 금리 수준 등을 결정한다. 2009년 우리은행에서 후순위채 콜옵션 미행사를 결정했을 당시 외평채 신용부도스왑(CDS)이 급등하는 등 채권시장 전반으로 충격이 퍼져나간 점도 이러한 인식 때문이다.
한 채권 전문가는 “역외 투자자들은 일반적으로 국내 금융사의 영구채에 대해 5년물로 인식했지만, 앞으로 30년물로 인식해 영구채 발행 조건이 이에 맞춰 바뀔 것”이라며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서 웬만한 금리로도 발행이 쉽지 않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고랜드 후폭풍으로 국내 채권시장이 경색된 국면에서 역외시장마저 한국계 외화채권(KP)에 대한 투자 수요가 많이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자, 국내 금융사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내년 돌아오는 KP 만기는 올해보다 22% 증가한 약 250억달러(35조4575억원)다.
국내 시장에서도 금융사, 특히 보험사의 채권 발행은 어려울 전망이다. 한 채권 전문가는 “국내 시장에서 은행채 발행을 자제하라고 하지만 이제는 채권을 발행해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전문가는 “흥국생명 탓에 시장의 암묵적인 약속이 깨지면서 역외시장에서 국내 금융사 영구채에 대한 매수가 아예 실종될 것 같다”며 “상대적으로 신인도가 높은 은행들은 정 어려우면 선순위채라도 발행할 테지만, 보험사들은 해외는 물론 국내 시장에서도 발행하는 채권이 소화가 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내년 초까지는 현재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융사들은 국내외 채권시장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며 자금 조달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금융지주는 채권안정펀드 등 95조원을 투입해 국내 시장 안정화를 꾀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대형 금융지주는 예수금이 충분해 당장은 대출 수요를 감당할 수 있지만 이대로 가기는 어렵다”면서 “만기 채권에 대비하고 자체 자본도 필요한데 채권을 어떻게, 언제 발행하는지에 대한 지주와 은행마다 자체적으로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금융당국 역시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실시에 대해 “계약상으로는 스텝업을 하는 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므로 채무불이행이라고 보진 않는다”며 진화에 나섰다. 당국은 이번 일과 관련한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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