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희생제의'만 반복한다면 그것이 진짜 참사
(서울=연합뉴스) 황재훈 논설위원 = 증오나 갈등으로 벼랑 끝에 몰릴 때 사회는 방향 전환을 위한 희생양을 찾곤 했다. 대부분은 갈등 원인을 개인 혹은 소수에 집중시키고, 지목된 소수는 다수의 '힘'에 의해 희생된다. 와해 위기에 몰렸던 공동체는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희생제의'를 통해 다시 안정을 찾는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역사는 끝없는 희생제의의 반복이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난 대중들의 반응이 충격과 슬픔이었다면,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듯하다. 지난달 29일 밤 참사가 발생하기 4시간 가까이 전부터 112 신고전화가 이어져 왔다는 녹취록이 공개된 이후부터는 확실해졌다. 분노의 수위는 급상승했다. 경찰청장이 공식라인으로 사고 관련 첫 보고를 받은 시점이 무려 참사 발생 2시간 가까이 뒤였다는 점도 공개됐다. 이런 총체적 난맥을 보고도 이해할 수 있겠노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거짓말쟁이가 분명하다.
경찰이 참사 당시 지휘부 보고를 늦게 한 책임을 물어 용산경찰서장과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으로 근무한 총경을 대기발령하고 3일 수사하기 시작했다. 경찰 특별수사본부는 전날에는 이번 참사 부실 대응 여부를 수사하기 위해 서울경찰청과 용산경찰서, 용산구청 등 7곳을 압수수색했다. 참사 전 4시간여 동안 11건의 신고를 받은 담당 경찰관들이 직무상 책임을 다했는지, 지휘관과 근무자들의 조치는 적절했는지 등은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책임질 사람들에게 응당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분노 해소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정작 이번 참사를 낳은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파악과 자기성찰에 소홀해질까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처럼 희생양을 찾아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문제를 얼렁뚱땅 봉합할까 봐 걱정스럽다. 벌써 조짐은 좋지 않다. 사회가 네편 내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탓하고 정치권도 가세할 조짐마저 보인다. 잘못하다가는 희생양 찾기 전쟁으로 시작해 그걸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참사 직후 소셜네트워크(SNS)에서 가짜뉴스가 퍼지고, 희생자들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미확인 루머가 여기저기 떠 돈 것도 그런 사전 징조였는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번 참사는 비단 안일했던 관료주의의 면피성 행태가 낳은 문제점만도 아닐 것이다. 비슷한 사고를 막기 위해 경찰이, 구청이, 시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법과 제도는 강제하지 못했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미리 만들어 주지도 못했다. 입법의 미비도 살펴봐야 한다. 참사 직전까지 핼러윈 현상과 축제만 표피적으로 보도하고 안전 문제를 경고 못 한 언론도 자유롭진 못하다. "나는 아니고 네 탓에 사고가 일어났어"라고 어느 한 사람, 소수에게만 손가락질하고 책임만 묻는다면 이는 또 다른 희생제의 반복일 뿐이다.
'블랙 스완'(검은 백조·Black Swan)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해 왔다. 있어서는 안 될 일,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실제 발생했을 때 쓰는 용어가 됐다. 세계정책연구소 미셸 부커 소장이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제시했던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는 말은 블랙 스완처럼 좀처럼 발생하지 않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대비하기 어려운 돌발 사태와는 달리 '위험 신호를 내뿜으며 돌진하는 위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돼 왔다.
이태원 참사는 어느 측면에서 블랙스완이기도, 회색코뿔소이기도 하다. 대형 사건·사고가 벌어진 뒤에는 으레 '어느 하나만 제대로 작동했어도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을 언론은 단골 메뉴처럼 읊조려 왔다. 다 사후에 하는 말일뿐이다. 이번 참사가 나기 전 누구라도 미리 경고음을 냈다면, 최악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분노를 조금 가라앉히면서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살펴보고 고쳐 나가는 것이 우리가 이 비극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희생제의만 반복한다면 그것이 진짜 참사일 수 있다.
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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