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트라우마 상황, 연대와 연결감 필요" [마음청소]

손성원 2022. 11. 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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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 인터뷰
편집자주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1일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가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 관련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원 인턴기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서울 한복판에서 3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안타까운 목숨을 100명 넘게 잃었다. 이태원 압사 참사로 생존자와 유가족, 목격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서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장에 있던 목격자와 구조인력 등까지 포함하면 최대 1만 명에 대한 트라우마 심리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트라우마는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 생명이나 신체적 안녕에 위협되는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말한다. 현장에서 참극을 목격한 사람들의 '직접 외상'도 있지만 온라인상에 떠도는 영상이나 소식을 접하고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간접 외상'도 발생하고 있다.

1일 오후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를 만나 이번 참사의 트라우마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허 전문가는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에서 트라우마 생존자들과 만나왔다. 최근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연습을 다룬 책 '우리는 모두 생존자입니다'(한겨레출판 발행)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상의 익숙한 곳에서 일어난 참사, 국민적 트라우마 더 심각"

2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한 시민이 헌화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1

허 전문가는 "이태원 참사의 경우 일상의 익숙한 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국민적 트라우마가 더 심각할 수 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든 접할 수 있었던 환경이기에 '나도 그곳에 있었다', '나도 그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직·간접적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돌아다니는 자극적인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당시 상황에 노출될 수 있기에 시민들의 충격은 더 클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트라우마 생존자를 전문적으로 만나온 허 전문가는 "개인적인 폭력이나 범죄 피해 생존자에 비해 재난 트라우마 생존자는 분노의 대상 혹은 가해자를 특정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며 "정부, 사회구조, 기업 등 여러 가해자의 책임이 뒤섞여 쏟아져 나오는 동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책임소재가 복잡하고, 배·보상 책임을 묻는 일이 어려울수록 위로받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도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불특정 다수 국민의 2차 가해도 재난 트라우마를 악화시키는 대표적 변수다. 그는 "같은 재난을 겪어도 경미한 신체 피해에서부터 가족을 잃는 것까지 피해 양상은 천차만별"이라며 "가족 내에서도 입장, 상황, 의견 차이가 있는데 모두 싸잡아서 하는 비난은 생존자나 유가족의 고통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우려했다.

"생존자나 유가족분들이 혐오나 비난을 받지 않고 오롯이 슬퍼하고 가족을 잘 보낼 수 있게 모두가 기다려주는 게 필요합니다. 재난은 생존자나 피해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견디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우선은 일상을 지속하는 게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의 애도는 사람마다 모양새가 다를 수 있다"며 "개인적인 애도의 방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서로의 애도 방식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나아가 "사회 전체가 애도와 슬픔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같은 방식의 애도를 요구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을 가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적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을 위한 분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상황. 허 전문가는 이럴 때일수록 분노의 방향을 잘 잡아야 이런 분노의 힘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분노의 목적은 시스템 개선을 촉구하고 사람을 더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하죠. 다만 이 과정에서 분노의 강도가 본인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나간다면 스스로를 더 괴롭힐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분노의 방향이 피해자나 본인을 향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선 격려와 연민의 태도를 가져야 해요."


"사건 발생 한 달 후에도 증상 지속되면 전문가 도움 필요"

1일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가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 관련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원 인턴기자

직·간접적 외상을 겪고 있는 국민이 트라우마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허 전문가도 "재난 이후 불안, 우울, 무력감 등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며 "사람마다 느끼는 반응도 시기도 모두 다르기에 그걸 충분히 인정해 줘야 한다"고 전했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행한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따르면, 외상을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신체·심리적 증상으로는 △침습(일상에서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반복되는 것) △회피(사건을 떠올리게 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피하려고 하는 것) △생각과 기분의 부정적 변화 △과다 각성(쉽게 놀라거나 화가 폭발하거나 지나치게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것) 등이 있다.

해리(dissociation)도 일어날 수 있다. 이는 사고, 감정 및 경험이 의식과 기억의 흐름에 정상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현상으로, 현실과 내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숨 쉬기 어렵거나 미칠 것 같은 느낌, 혹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공황 증상도 일어날 수 있다. 허 전문가는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나도 증상이 유지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다"며 "일상이 많이 불편하면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수용과 변화의 균형으로 앞으로 나갈 힘 얻을 수 있어"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한 시민이 기도를 하고 있다. 뉴시스

허 전문가는 트라우마 치료에서 '변증법행동치료'를 강조한다. 심리치료 이론 중 하나인 변증법행동치료는 과거와 현재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수용)과 바꿀 수 있는 건 바꾸는 것(변화)에 초점을 둔다.

"사고를 당했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선 받아들이되, 앞으로 어떻게 할지 또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를 찾는 것도 함께 가야 합니다. 수용에서 중요한 건 자신의 행동을 탓하지 않는 건데요. '부모가 날 때렸다'는 사실은 수용의 대상이 되지만 '내가 잘못해서 날 때렸다'는 평가나 해석은 수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수용과 변화의 균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과거의 사실에만 머물게 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만 집중하다 보면 충분한 애도 과정을 놓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둘 간의 균형입니다."

트라우마 치유에는 3단계가 있다. 허 전문가는 "1단계는 현재에 머무르는 것으로,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단계"라며 "그라운딩 등을 통해 현재 안정감을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단계는 과거와 마주하는 것으로, 트라우마 기억을 일반 기억과 유사하게 정리하고 처리하는 단계다. 마지막은 미래를 바라보는 단계다. 트라우마 이후의 삶이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살아가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고 계획하는 과정이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 사별을 목격하고 참사를 함께 견디는 우리 모두는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애도해야 합니다. 일상을 제쳐두고 슬픔과 애도에만 빠져 있는 상태, 혹은 슬픔과 절망감을 모른 척하고 마음 깊이 밀어내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마음 모두 해롭습니다."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

허 전문가는 "참사 트라우마 이후 우리 사회에 남은 과제는 연대와 연결감"이라고 말했다. "재난 트라우마는 절대 혼자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조직은 힘든 감정을 동료와 함께 털어놓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빠르게 치유받을 수 있게 서로 도와야 합니다."

연결감은 엄마와 아이 사이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어린 아이는 엄마가 내 눈 앞에 보여야 존재한다고 믿지만 조금 더 자라면 내 눈앞에 없어도 엄마는 나와 연결돼 있다, 존재한다라고 믿죠. 연결감이 끊어진다는 건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느낌을 줍니다. 절망, 무력, 우울에 빠질 수 있죠. 혹시 주변에 날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렵다면 상담자와의 연결감을 통해 마음을 키우는 게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생존'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느라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마음속에 어떤 게 있는지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들 옆에서 기다려주고 그들이 원하는 도움을 제공하는 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요."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
평범한 이웃들의 비범한 고민, 일상을 지키는 마음 돌봄 이야기를 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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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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