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벨라 차오'와 안진생, 그리고 이브 몽탕

조성관 작가 2022. 11. 3. 12:2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에 등장하는 '교수'와 '베를린' / 사진= '종이의 집' 공식 홈페이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KBO리그는 독특한 응원문화가 있다. 두 팀의 치어리더들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춤을 추고, 응원단이 타자별 응원가를 만들어 타석에 설 때마다 관중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없는 한국적인 현상이다.

2022년 한국프로야구는 불세출의 타자 이대호가 박수를 받으며 은퇴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야구장에서 이제 더 이상 이대호를 향한 부산 갈매기들의 떼창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오~롯데 이대호, 오~롯데 이대호~~~'

이대호가 은퇴한 KBO리그 최고의 타자는 키움 이정후. 그러나 그의 응원가는 재미도, 파워도 없다. 가사와 멜로디에서 이정후의 폭발적인 스타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응원가는 귀에 쏙쏙 들어와야 한다.

스타급 선수들만 보면 KIA 나성범 선수의 응원가가 귀에 꽂힌다. '타이거즈, 나성범 안타~ 안타, 날려라 날려라 타이거즈 나성범 홈런~홈런 날려라 날려라'.

넷플릭스 인기시리즈 '종이의 집'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어, 이건!'하는 반응을 보인다. '종이의 집'에서 범죄조직의 리더인 '교수'가 '베를린'과 처음 합창했던 노래.

영화에서 강도들이 출정가(出征歌)처럼 부르며 연대감과 결속감을 다지는 노래. 그들의 눈빛은 마치 독립전쟁에 나가기 전날 밤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하는 것 같다.

'벨라 차오'(Bella Ciao).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맞섰던 저항군(파르티잔)의 투쟁가다. 영어로 'Goodbye Beautiful'(굿바이 뷰티풀). 우리말로 옮기면 '안녕, 내 사랑'.

1943~1945년 저항군 사이에서 유행한 '벨라 차오'. 이 노래의 작사·작곡가는 미상이다. 이탈리아 북부 포(Po)강 평야의 쌀농사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을 저항군들이 가사를 바꿔 불렀다. 가사를 보자.

'~~~오,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주오. 오, 안녕 내사랑! 안녕, 안녕히! 오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주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다오~~~” 내가 파르티잔으로 죽으면 (내가 산에서 죽으면) 나를 묻어주오~~~'

1925년의 베니토 무솔리니 / 사진=위키피디아

무솔리니 저항군으로 활동한 한국인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정권을 잡은 게 1922년.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이외에 모든 정당을 해산해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언론 검열을 실시해 언론자유를 말살했고 지방자치제도를 폐기했다. 경찰과 군대의 간부는 파시스트들로 채웠고, 파시스트 행동대들이 좌익들을 탄압했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저항군으로 활동한 한국인이 있다. 안진생(1916~1988) 전 콜롬비아 대사. 안중근 의사의 조카다.

안태훈·조마리아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과 안성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한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게 1910년 3월26일.

그 후의 안중근 집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안중근 집안은 사실상 둘째인 안정근(安定根·1885~1949)이 이끌었다. 안중근 집안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두만강 건너 연해주 러시아로 망명한다. 러시아 땅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서였다. 이때부터 안중근 집안의 파란만장한 디아스포라가 펼쳐진다.

안정근 일가는 10년을 러시아 땅에서 산다. 안정근은 러시아군에 입대해 1차대전에 참전했고, 1920년 청산리 전투 당시 홍범도 등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청산리 전투 후 연해주가 불안해지자 안정근은 형의 자녀 등 가족을 데리고 상하이로 갔다. 2세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로 일했다.

1925년 안정근은 다시 직계 가족을 데리고 산동반도 끝의 웨이하이(威海)로 간다. 안정근은 그곳에서 어선 사업을 하며 선단 건조를 시도했다. 본국에 상륙할 어선 겸 공작용 선박을 만들던 중 정보가 누설돼 실패로 돌아간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홍콩으로 피란을 갔다가 잠시 베트남에 살기도 했다.

러시아군 군복을 입고 있는 안정근과 러시아 여권 / 사진=조성관 작가

해상 운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안정근은 아들 진생을 선박 전문가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1938년 이탈리아로 보내 조선공학을 공부하게 했다. 안진생의 이탈리아 유학은 중국인 신부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안진생은 이탈리아 유학 시절 중국인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하는 저항군에 가담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채 떠도는 식민지 백성으로 저항군에 동병상련을 느낀 것이다. 안진생은 저항군 전투기에 포탄을 싣고 장착하는 일을 맡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7월, 그는 제노아공대에서 조선공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던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난생처음 조국의 땅을 밟아보았다.

이후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을 맡기도 했다. 1962년 새로 탄생한 박정희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어업차관을 빌려야 했다. 수소문해보니 국내에 이탈리아를 알고 이탈리아 말을 하는 사람은 안진생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 낸다. 이렇게 18년간의 외교관 생활이 시작된다.

2004년 8월, 나는 주간조선에 10쪽짜리 '안중근 동생 안정근, 청산리전투서 맹활약'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 작성은 안진생의 부인 박태정 여사(1930~2021)와 장시간 인터뷰를 통해 가능했다.

박 여사는 평생을 간직해온 시아버지 안정근과 남편 안진생의 관련 사진과 자료를 다 보여주었다. 언론 노출을 꺼려온 박 여사와의 인터뷰는 정치 인생을 안중근 유해 발굴과 봉환에 헌신한 김영광 전 의원(1931~2010)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이후 박 여사와의 인연은 작고할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박 여사의 고결한 인품에 매료되었다.

1945년 7월 제노아공대 박사학위자 앨범 속의 안진생. 오른쪽 사진은 저항군과 기념사진을 찍은 안진생(오른쪽 끝 흰색 코트를 입은 사람) / 사진=조성관 작가

뼛속 깊은 공산당 집안의 마르세이유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적지 않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조국을 등졌다. 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나라는 기회의 땅 미국이었다. 그다음이 프랑스였다. 대서양을 건널 여비 마련이 쉽지 않은 이들은 국경을 맞댄 프랑스 마르세유로 갔다.

그들 중에는 파시스트와 원수지간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빗자루 제조상 조반니 리비는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다음해인 1923년, 솔가해 마르세유로 간다.

조반니 리비는 뼛속 깊은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세상에서 공산주의자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조반니 리비는 세살 짜리 막내아들 이보 리비(Ivo Livi)를 포함해 자녀들을 데리고 마르세유를 선택했다.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보 리비는 부두 노동자, 미장원 보조 등을 전전한다. 잘생기고 목소리가 좋은 이보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1938년 마르세유 뮤직홀에 데뷔하면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꾼다.

이브 몽탕(Yve Montand).

'이보, 위로 올라와'라는 뜻이다. 가수로 성공하려면 파리로 가야 했다. 1944년 몽탕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파리로 상경했다. 파리 최고의 밤무대였던 물랭 루주에 신인가수로 데뷔한다. 무명 가수를 눈여겨본 파리 샹송계의 실력자 에디트 피아프가 매니저 역할을 맡으며 그는 1년 만에 스타가 된다.

1987년 칸 영화제에서의 이브 몽탕 / 사진=위키피디아

가수 겸 배우로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 스타가 된 이브 몽탕. 그는 동시에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로도 기억된다. 열혈 공산당원 활동 때문이다.

스타가 된 1950년 그는 프랑스공산당(FCP)에 입당해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자신의 자유롭고 호화로운 생활과 배치되는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오랜 기간 미국 정부로부터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몽탕이 프랑스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1968년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의 자유화 운동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다.

몽탕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곳은 낙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해묵은 고정관념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몽탕의 자기 모순적인 신념은 아버지의 왜곡된 밥상머리 교육에서 비롯했다.

'벨라 차오'를 흥얼거리다가 뜻하지 않게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 박태정 여사와의 추억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이브 몽탕이 파리 올랭피아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고엽'이 듣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uthor@naver.com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