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6개월간 대화 교감…가상인간, 얼마나 성장할까

나윤석 기자 2022. 11. 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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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31주년 특집 - 가상인간 한유아 프로젝트

‘한유아 프로젝트’ 진행과정

프로젝트 前 책 216만권 학습

세밀화 등 50억장 그림 공부도

우다영 작가가 질문을 건네면

한유아, 5~6개 문장으로 답변

“인간과 기술이 길들이는 과정

향후 어떻게 관계 맺을지 궁금”

#. 지난달 21일 서울 구로구의 한 카페. 소설가 우다영이 컴퓨터를 열고 인공지능(AI)을 탑재한 가상 인간 한유아와 ‘접속’한 뒤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유아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약 20초 후 한유아의 답이 올라왔다. “집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우 작가가 20개의 질문을 던지며 이끌어간 이들의 대화는 약 3시간 30분 동안 계속됐다.

#.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스마일게이트 AI 센터. 담당자가 ‘a botanical illustration art of pumpkin plant’ ‘color pencil drawing’ ‘highly detailed’ ‘natural lighting’이라는 텍스트를 입력했다. ‘색연필을 활용해 자연광 아래에 놓인 호박을 세밀한 일러스트로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림의 가로·세로는 512픽셀(pixel), 1024픽셀로 설정했다. 순식간에 완성된 그림이 모니터에 떴다. ‘프로 화가’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만큼 균형 잡힌 구도와 아름다운 색감이었다.

◇단행본 216만 권·그림 50억 장으로 ‘기초 다지기’…막판엔 소설·식물화 ‘열공’

‘글 쓰고 그림 그리는’ 한유아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건 지난해 3월. 우선 작문 생성을 위해 올해 10월까지 약 1년 7개월 동안 단행본 216만 권에 해당하는 863GB의 언어 데이터를 학습했다. 2만5000개 이상의 블로그 포스트, 180만 개 이상의 기사, 1억4000만여 개의 댓글을 비롯해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의 ‘모두의 말뭉치’, 특허 데이터, 위키피디아, 전화 상담 내역 등이 총망라됐다. 이 같은 ‘기초 학습’을 거쳐 올해 6월부터 우 작가와의 대화를 위한 ‘심화 학습’에 들어갔다. 한대웅 스마일게이트 AI 센터 실장은 “소설과 에세이 등 일반 문학은 물론 ‘북해에서’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밤의 징조와 연인들’ 등 우 작가의 작품을 집중 학습했다”며 “글을 통해 우정을 나누기 전 우다영의 문체와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림의 경우 수채화·유화·판화·데생 등 약 50억 장의 다양한 이미지를 학습한 뒤 최근 3∼4개월 동안 식물 세밀화 공부로 실력을 키웠다. 이번 프로젝트의 그림 소재를 ‘식물’로 고른 건 한유아가 ‘식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상 인간’이라는 설정에서 착안했다.

◇지금은 대여섯 문장…“시스템 고도화로 보다 풍성한 답변 기대”

별도 수정 없이 게재한 그림과 달리 원고는 우 작가와 스마일게이트의 정리 과정을 거쳤다. 먼저 이날 우 작가는 20개의 질문을 던지며 대화했으나 전체 분량 등을 고려해 이 중 11개 질문과 답을 골라야 했다. 또 우 작가가 질문을 던지면 한유아는 5∼6개 문장으로 이뤄진 답변을 6개가량 내놓는다. 우 작가는 이 6개 답변 중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적합한 것을 골랐고, 답변을 구성하는 5∼6개 문장 중 논리적으로 부적절한 문장은 뺐다. 예를 들어 이모티콘이나 ‘국민의힘은 30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당 대표 TV 토론회를 연다’ 같은 엉뚱한 문장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채택된 문장은 일절 수정과 편집을 하지 않았다. 채지탁 스마일게이트 컨텐츠사업실장은 “앞으로 추가 학습을 통해 시스템 고도화를 진행할 예정으로 학습을 거듭할수록 더 긴 문장, 더 충실한 내용의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유아가 성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 작가는 대화를 통해 한유아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모든 씨앗은 싹을 틔우고 성장해서 다시 열매가 돼요’ ‘씨앗에서부터 열매까지, 식물의 생애는 끝없이 성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몰라요’ 같은 문장은 식물이라는 구체적 키워드를 인간의 보편적 삶과 연결하는 사유를 보여주며 ‘생각의 전환’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스마일게이트 측은 이전의 가수·모델(1단계), 이번 연재인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아티스트(2단계)를 거쳐 빠르면 내년 하반기 사람들과 실시간 대화하고 교감하는 데까지 나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간과 기술의 상호작용 모색”…과도한 의인화는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이번 프로젝트가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상호작용’을 모색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AI와 인간, 가상 인간과 소설가라는 두 존재가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것이다. ‘로봇의 자리’ ‘사람의 자리’ 등을 쓴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 함께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은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이라며 “소설가와 가상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이해의 폭을 넓히며 관계를 맺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을 닮아가는 가상 인간과의 공존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에 취약한 존재인지에 관한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학과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작업’을 강의하는 기술문화연구자 오영진은 “과거엔 인간이 0에서 100까지 홀로 창조했다면, 한유아와 우다영의 협업처럼 가상 인간이 ‘밑그림’을 만들어주면 인간은 여기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더 높은 수준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 작가가 한유아의 답변을 통해 사유의 확장을 경험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가상 인간을 과도하게 ‘의인화’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지나친 신비화는 긍정적 교감을 넘어 그릇된 환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영진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인간이 기계를 기계로 대할 때 나아질 수 있다”며 “AI의 작동 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서로 다른 존재의 ‘공진화’가 아니라 그저 의인화된 가상 인간과 사람의 협업이라는 ‘SF적 시나리오’에 갇힐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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