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흥국생명 콜옵션 포기, 위기의 서막일까?

임태우 기자 2022. 11. 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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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일) 국내 자금조달 시장을 불안에 떨게 한,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내 보험사 흥국생명이 과거 자금을 조달하려고 발행했던 신종자본증권에 대해서 빌린 돈을 갚겠다는 의미의 '콜옵션'을 느닷없이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겁니다. 지금 우리 기업들이 처한 자금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흥국생명은 2017년 11월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해 당시 환율로 5천억 원이 넘는 돈을 시장에서 빌렸습니다. 이런 신종자본증권에는 관행적으로 돈 빌리고 5~10년 뒤에 원금을 갚겠다는 약속인 '콜옵션'을 붙입니다. 흥국생명도 당연히 발행일로부터 5년 뒤인 2022년 11월 9일에 콜옵션을 행사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99.99999% 비율로 이 콜옵션을 행사해 원금을 조기에 상환합니다. 그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이기도 하고, 콜옵션을 포기하면 이자 금리가 껑충 뛰는 '스텝 업' 조항도 있어 상환 부담이 더 커지기 전에 갚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최근 13년간 국내 대기업들 가운데 콜옵션을 포기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딱 한 번, 2009년에 우리은행이 콜옵션을 포기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육박하던 상황에서 국내 여러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죠. 우리은행은 당시 4억 달러 후순위채 콜옵션의 행사 시기가 도래하자 자금조달 여건이 어렵다는 이유로 콜옵션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들이닥쳤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들이 일제히 '소탐대실'이라며 우리은행을 혹독하게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신인도가 추락할 거라는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이 '왕따' 당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우리은행은 관행에 굴복하고 콜옵션을 행사해 원금을 조기 상환했습니다.

콜옵션을 포기한 흥국생명


그런데 우리은행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콜옵션 포기를 이번에 흥국생명이 해버린 겁니다.

일단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밝힌 이유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국내외 금융시장 여건이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② 금리도 가파르게 올랐다는 겁니다. 흥국생명은 이번에 콜옵션을 행사해 원금 5억 달러를 갚고 나면 다시 새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데, 금리도 높고 자금시장도 불안해서 돈을 빌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신뢰가 생명인 보험회사가 지금 돈에 쪼들리고 있다는 뜻을 내비친 셈입니다.

시장은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콜옵션 포기 소식이 퍼지자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30% 이상 급락했습니다. 관행적으로 채권에 투자해 안전한 수익을 노리려 했던 채권 매수자들은 순식간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폭락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레고랜드 사태가 국내 채권시장의 신뢰를 흔들었던 것처럼 흥국생명 콜옵션 포기는 국제 시장에서 한국채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습니다.

실제로 흥국생명의 콜옵션 포기 소식에 한화생명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액면가가 100달러였던 한화생명의 달러화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이 사태 직후 매도세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호가가 70달러 수준으로 급락했습니다. 내년 4월 콜옵션 행사를 앞둔 한화생명은 차환 발행을 위해 지난달 1조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검토했지만, 시장 변동성이 크다는 이유로 계획을 잠정적으로 미뤄둔 상태였습니다. 시장이 보기에 이러다가 한화생명도 흥국생명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며, 불안에 빠진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팔자 행렬에 나섰던 겁니다. 여기에 KDB생명보험 역시 내년 2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만기가 다가오고 있어 불안해진 시장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레고랜드 사태가 필드 밖 선수가 소란을 피운 경우라면, 이번 흥국생명 사태는 필드를 직접 뛰는 선수가 '나 지금 힘들다'라고 폭로한 격이어서 시장은 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논란이 일자마자 우리 금융당국은 즉각 메시지를 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채무불이행은 문제 되지는 않는 상황이며 기관투자자들과 지속 소통 중에 있다"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그간 금융당국이 흥국생명의 콜옵션 포기 움직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소통해왔다며 우발적인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큰 재앙이 닥치기 전 작은 사고들이 빈발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레고랜드부터 흥국생명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가, 우리 경제에 던지는 경고들 아니겠느냐는 우려가 가시질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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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임태우 기자eigh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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