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헤치는 영월 동강 … 귀농 부부 · 청년이 일군 ‘레저 성지’
■ 관광두레 협동조합 ‘동강 리버버깅’
15년전 대기업 퇴직 박씨 부부
취미서 레저사업으로 발전시켜
손님으로 온 ‘욜로족’ 김씨 만나
주민사업체로의 전환 제안 받아
폭우때 선착장 정비도움에 감동
큰 기대 수익 없어도 믿고 수락
지역 ‘관계인구’ 확장 목표 삼아
관광객 유입 · 소비 확대 등 모색
영월=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강원 영월 김삿갓면의 고씨동굴 하류 쪽 강변, 그러니까 영월 동강 물길이 충북 단양을 목전에 두고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다는 자리쯤에 ‘동강 리버버깅’이 있다. 신종 1인 수상레포츠 ‘리버버깅’을 즐길 수 있도록 장비를 대여해주고 교육하는 레저업체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울 출신으로 대기업에서 은퇴해 귀촌생활을 하는 박철희(60)·박주희(여·53) 부부가 꾸려나간 개인 회사였던 동강 리버버깅은, 올해 지역 청년들과 의기투합해 관광두레 협동조합으로 새로 출범했다. ‘관광두레’란 관광지 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돼 이끌고 나가는 관광사업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직장생활을 끝내고 인생 2막을 꿈꾸며 지방으로 내려온 도회지 출신 은퇴 부부는 어떻게 지역 주민, 청년과 합심해 주민사업체를 꾸리게 됐을까.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은퇴한 중년 퇴직자와 지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똑같은 꿈을 꾸게 됐을까. 이들이 함께 나누고 있는 연대의 즐거움과 유쾌한 꿈에 대해 들어보자.
◇도시 출신 은퇴 부부, 영월에 뿌리내리다=동강 리버버깅 대표는 부인 박주희 씨다. 남편 박 씨는 이사 직함을 갖고 있다. 남편 박 씨는 삼성계열 기업 출신. 경제적 풍요는 누렸지만 대신 늘 스트레스 속에 쫓기듯 생활해야만 했던 직장생활을 15년 전쯤 과감하게 정리했다. 퇴직 후 그는 튜브 모양 배를 타고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리버버깅을 즐기러 자주 드나들던 영월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박 씨 부부는 평소에도 수중레포츠를 즐겼다.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부인도 스킨스쿠버 어드밴스 자격증까지 있으니 가벼운 취미 수준은 넘는다.
“동강에서 래프팅이 성행하던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강 하류인 이곳에도 래프팅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래프팅 인구가 줄고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하류 쪽 업체들이 다들 문을 닫았습니다. 다른 어떤 곳보다 수량도 풍부하고 경관도 좋은데 말이죠.”
남편 박 씨는 래프팅이 쇠락해가는 상황에서 ‘리버버깅’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리버버깅은 1990년대 말 뉴질랜드 급류스포츠 전문가가 고안한 신종 레포츠. 개인용 튜브를 장착하고 강물(River)을 떠내려오는 모습이 벌레(Bug) 같다고 해서 리버버깅(River Bugging)이라 이름 붙여졌다. 개인 레포츠로 혼자서도 탈 수 있는 데다, 수심이 얕거나 깊거나 상관없이 전천후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신종 수상레포츠가 이어준 인연=처음에는 개인적으로 타려고 장비를 구입했다가 몇 번 태워준 민박 손님이 그 매력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장비를 추가 구입했다. 서너 대로 시작한 것이 수십 대로 장비가 늘어나면서 동호인들이 생겨났다. 신종 레포츠가 흥미로웠는지 TV 프로그램에도 소개되면서 손님들이 크게 늘었다. 취미생활이라 여겼던 리버버깅이 제법 쏠쏠한 레저사업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박 씨 부부가 꿈꿨던 희망은 딱 여기까지였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됐고, 이 정도면 잘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영월 출신의 엉뚱한 청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동강 리버버깅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던 지난해 초여름, 남편 박 씨는 리버버깅을 하러 온 귀향 청년과 우연히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가볍게 참석한 자리였는데, 그날 만남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남편 박 씨는 그날을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2021년 6월 19일. 그때 박 씨가 만난 청년이 지금 영월 관광두레 PD인 김태호(39) 씨다.
지금이야 어엿한 관광두레 PD지만 그는 그때 3년간의 제주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영월로 돌아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고민하던 백수였다. 그는 대학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공부하고 졸업 후 온라인여행사의 앱 기획과 프랜차이즈 마케팅 일을 했다. 그러다 서핑에 미쳐 어느 날 문득 제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제주에서 더없이 자유롭게 생활했다.
◇리버버깅에 매료된 영월 청년의 꿈=“1주일만 서핑하고 와야지 했던 게 ‘하루 더, 하루 더’하다가 3년을 제주에서 보내게 됐어요. 한 달에 보름은 막노동이나 식당 일, 입주청소를 하고, 나머지 보름은 서핑을 하거나 노는 생활이었지요. 그러면서도 줄곧 SNS를 놓지 않았는데 현재의 행복을 누리는 이른바 ‘욜로족’의 삶이 신기해 보였는지 제법 인기가 있었어요. 덕분에 홍보까지 겸하는 아르바이트 몸값이 제법 올랐지요. 그러다 고향 영월에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됐어요. 부모님도 영월에 계시고, 고향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영월로 돌아왔어요.”
수상레포츠를 취미로 즐기던 그는 처음 타본 리버버깅에 매료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그는 박 씨를 붙잡고 “10년 전 래프팅의 성지였던 영월을 리버버깅으로 다시 여름 수상레저의 성지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박 씨는 그에게서 ‘청년 시절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청년 김 씨는 동강 리버버깅의 가이드로 합류했다.
◇영월 청년, 두레 PD가 되다=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된 관광두레 사업에서 희망을 본 김 씨는, 내친김에 아예 영월지역 관광두레 PD에 지원해 덜컥 선발됐다. 동강 리버버깅뿐만 아니라 영월의 다른 지역 주민사업체의 발굴과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관광두레 PD가 된 뒤 그는 가장 먼저 박 씨에게 달려가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고 지역 일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동강 리버버깅을 주민사업체로 전환해 협동조합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박 씨 입장에서는 그리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혼자서도 잘 운영해온 사업을 굳이 누군가와 함께 나눌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 지난 장마 때였다. 고무보트로 만든 리버버깅 선착장이 장맛비로 다 떠내려갈 절체절명의 상황. 강물은 떠밀려온 나뭇가지며 쓰레기들로 엉망이었는데,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김 PD가 래프팅 사업을 하는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곤 둘이 물로 뛰어들어 척척 선착장을 고정한 뒤 강물을 헤치고 나왔다. 도시 출신의 은퇴한 중년 부부와 영월 청년들과의 선의의 교류가 굳은 믿음으로 ‘질적 전환’하는 순간이었다.
◇관계인구에서 희망을 찾다=그렇다면 앞으로 동강 리버버깅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박 씨와 김 PD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개별 사업 성공보다는 ‘관계인구’ 확장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들은 수상레포츠가 됐든, 체험활동이 됐든, 주민사업체는 지역과 관광객의 관계 맺기를 통해 영월의 ‘관계인구’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했다.
관계인구란 그 지역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관광이나 체험, 혹은 동향 출신 등으로 지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관계인구를 늘린다는 건 지역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대와 함께 지역 방문이나 농산물 구입 등의 소비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관계인구를 늘린다는 건 개별 단위 사업의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개념인 셈이지요. 관계인구 확장은 리버버깅 사업의 성공보다 더 값진 성과물이 될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리버버깅이든, 농산물 수확체험이든, 아니면 특산물 빵집이든 지역의 주민사업체들이 다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동강 리버버깅의 박 씨의 설명이었다. 나이가 스무 살쯤 더 많은 박 씨를 ‘좋은 꼰대’라 부르며 따르는 김 PD도 박 씨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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