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도 사실로 믿는 탈진실… “反정치 · 反지성 · 反통합 깨라”
■ 창간 31주년 특집 - K-정치 실종, 미래 찾는다
극단적 진영싸움
정치권, SNS · 뉴미디어로 선동
대장동 수사 · 서해 피격 사건 등
“정당한 수사” “정치 공작” 양분
정치권 ‘3反’의 후진성
폭로 국감 · 대통령 연설 거부…
與도 野도 타협 · 협치 무너뜨려
극한대립으로 사실상 정치마비
조짐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탈진실의 시대’가 부각된 것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검찰 수사 때부터였다. 국면 내내 두 진영으로 갈라져 나만 옳고 상대방은 그르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SNS, 뉴미디어의 발전과 맞물려 이제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렸다. 그렇게 나라는 두 쪽 났고, 정치권은 각각 극단의 선봉에 섰다. 한쪽의 ‘가짜 뉴스’는 반대쪽의 ‘대안적 사실’이 됐다.
대안적 사실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 인원 공방에서 시작됐다. 미국 언론들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 사진과 비교하며 ‘역대 최저 지지율로 출범한 인기 없는 정권’이라는 기사를 냈고,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은 사실과 다른 브리핑을 했다. 이후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거짓말이라는 지적에 대해 “대안적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거짓말’이 ‘대안적 사실’로 포장된 순간, 특정 진영엔 사실이 됐다.
전(前) 정권 안보 라인이 수사 대상인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는 대장동 관련 검찰 수사를 대하는 정치권과 지지층의 모습 역시 전형적인 ‘탈진실의 시대’ 망가진 우리 정치 문화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전 정권과 야당을 겨냥한 정치 공작이라는 메시지와 정당한 수사라는 주장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극복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탈진실’의 시대 =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3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상대방의 주장은 옳은 말이라도 가짜 뉴스라고 이야기한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나도 너도 모두 옳다라면,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는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 극단적 진영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쌓여온 갈등이 이제는 증폭돼 합의점이나 중립 지대를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라며 “정당과 정치 입장에서도 균형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조국 사태 때 ‘조국 수호’를 외친 서초동 집회와 ‘조국 타도’를 외친 광화문 집회로 나누어진 것처럼 탈진실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분열로 이어진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보통 양극단, 여야의 목소리 큰 사람은 10% 안팎인데 이들 때문에 다수는 침묵하게 되고 소수의 목소리가 여론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심화시키는 건 SNS의 발달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레거시 미디어를 통한 전문가의 발언 등이 갈등 조정 역할을 했는데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며 유튜브 등 공간에서는 갈등을 조장하는 메시지가 나오고 전문가의 권위는 실종됐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 해도,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인한 변화라 해도 이를 악용하고 조장하는 건 정치다. 안 교수는 “SNS·뉴미디어가 가진 부정적 영향과 제도적으로 양극화를 촉진시키는 당의 구조적 영향으로 정치인들은 선동을 통해서 집권하고자 하는 부정적 의미의 포퓰리스트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정치·반지성·반통합, 3반(反) 극복해야 = 항상 현실 정치를 향한 비판은 매섭지만 21대 국회는 이미 그간 불문율처럼 존재해 왔던 관행들을 하나하나 깨트렸다. 전반기 국회 때는 비록 정해진 기한은 지키지 못할지언정 의석수대로 배분해왔던 상임위원장 자리를 다수당이 독식하는 상황이 됐다. 물론 미국의 경우 다수당이 전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하지만 각 나라 의회마다 상임위 배분에 역사적 맥락이 있다. 후반기 국회 때는 대통령의 첫 번째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을 야당이 거부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두 사례 모두 우리 정치가 ‘선(線)’을 넘은 사례다. 정치 스스로 정치를 무너뜨린 행태로, 반정치이자, 반정치를 확대재생산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역사상 가장 극단적 행태로 가고 있고, 이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도 굉장히 심각하다”며 “정치인들이 이런 현상을 확대재생산하거나 활용하고 있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국회 관계자는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청담동 술자리’를 폭로하고 이에 대해 여야가 계속 공방을 벌이는 상황은 얼마나 우리 정치가 망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합리적 토론 능력을 상실한 반지성 사회로 전락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 정치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반지성주의’를 꼽았지만 또 야권에서는 윤 대통령을 향해 ‘반지성주의’라 비판한다.
타협과 협치로 상징되는 정치가 무너지고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고 전문가의 권위와 합리적 토론을 통해 사회 전반의 두터운 ‘합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망가지면 반통합이 고개를 든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중도층에게 남은 정치 참여는 이쪽 심판했다가 저쪽 심판했다가 하는 지속적인 심판, 영구 심판밖에 없다”며 “정치가 점점 형해화되고 협소화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존하는 여러 생각들, 이해관계들을 조율하고 갈등을 조정해 사회 내의 통합을 꾀하는 게 대의제 정치”라며 “오히려 정치가 사회의 증오를 만연하게 하는 부정적 기능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결국 정치는 서식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진화한다. 정치의 서식 환경, 즉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며 “의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도록 공천 개혁을 하는 게 국민 통합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권혁주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여야 간 극한적 대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포퓰리즘 정치가 메꾸고 있다”며 “정당이 권력 획득만이 아니라 우수한 정책의 생산자가 되도록 정책 분석 및 정책 설계 능력을 높이는 제도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병기 기자 mingm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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