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템포'에 맞춰, 자전거로 즐기는 늦가을의 비엔나
늦가을의 비엔나에선 걷기보단 달려야 했다.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공원을 지나 궁전을 거쳐 구시가지까지 페달을 밟았다.
"계절 바뀌는 냄새가 난다. 식어 가는 땅에서. 야위어 가는 나무에서. 나뭇잎을 갈변시키는 햇빛에서. 바퀴 아래 까드득 깨어지는 솔방울에서. 바람에 올라타 멀리 퍼져 세상에 밴 여름 냄새를 조금씩 벗기는, 그런 냄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오목한 자장 안에서 마음이 쉰다. 눈도 쉬고 손도 쉬고. 페달 밟던 발도 잠시 멈춘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마침내, 비엔나에, 또다시 가을이 왔다고."
●신입의 자전거
늦가을의 비엔나는 색이 많아 선명해 눈맛이 시원했다. 초록을 뱉어 낸 노랑, 연두를 밀어낸 빨강이 두 발을 재촉했다. 걷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달려야겠다는 결론. 해답이 내려졌다.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비틀비틀, 핸들이 휘청인다. 낯선 도시에서 웬 라이딩? 자전거 애호가도 아닌 내가 고민 없이 페달에 발을 올린 이유는, 여기가 오스트리아 비엔나기 때문이다. 비엔나는 자전거를 위한 도시다. 1,600km에 이르는 방대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시내 거의 모든 곳에 깔려 있고, 자전거용 신호등이 따로 설치돼 있는. 자전거 주차 공간만 해도 5만6,000개 이상인, 그런 도시. 땅부터도 그렇다. 언덕이 없고 평지가 많아 초보 라이더일지언정 땀 흘릴 일은 좀체 없다. 비엔나의 자전거가 서울의 카페만큼이나 많은 이유. 물론 자전거 경로 확장 등 자전거 친화적인 정책들을 다수 펼치고 있는 정부의 공도 크다. 올해 5월, 비엔나에서 유독 사이클리스트가 기록적으로 증가한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모든 여행자는 초행길에서 세상에 갓 입사한 신입이 된다. 헤매고, 착각하고, 혼동하고, 당황하고. 여기에다 바퀴 달린 탈것까지 끌고 다니면 배로 어리숙해진다. 그곳이 아무리 비엔나라 할지라도. 본의 아니게 역주행을 한다거나, 인도에서 '길막'해 잔소리를 들은 것에 대한 변명은 아니고. 뭐, 문화에 적응한다는 게 다 이런 거 아니겠나. (안타깝게도)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비엔나시 정부에서 정해 둔 자전거 교통 법규가 꽤나 촘촘하다. 예를 들면 우측통행이 기본, 건널목에서는 시속 10km 이상으로 달려선 안 된다는 것. 자전거 운전자는 자전거를 위해 마련된 모든 차선에서 우선 통행권을 가진다는 것 등등. 신입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규칙들.
자전거에 필수로 장착돼야 하는 장비도 따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사실 여행자들은 개인 소유의 자전거가 없을 확률이 높으니, 보통 공유 자전거를 이용한다. 만약 거리에서 빨갛고 하얀, 오스트리아 국기 색의 자전거를 본다면 99%의 확률로 빈모빌(WienMobil)의 자전거다. 빈모빌은 비엔나의 대표적인 공공자전거 대여 서비스다. 쉽게 말해 '비엔나식 따릉이'랄까. 비엔나 전역에 200개 이상의 대여소가 있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요금은 30분당 0.60유로, 한화 약 830원. 적어도 수시로 시계를 볼 필요는 없을 만한 금액이다. 단시간에 도시를 스캔할 수 있는 제일 재밌는 방법인 것치곤 가성비가 훌륭하다. 아, 유일한 단점이라면 한국인에겐 안장이 높다는 것 정도? 160cm 기준, 높이를 최대한 낮춰도 발이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종족의 신체적 특징이 달라서겠거니. 숏다리의 비애는 아무튼 아닌 걸로.
이제야 '길막'하지 않는 법을 터득한 자전거는 구시가지를 달린다. 도시 중심부인 구시가지는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슈테판 대성당, 성 페터 성당, 호프부르크 왕궁 등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역사적 건물들이 모래알처럼 자잘하게 흩뿌려져 있다. 여기에 배경음악으로는 클래식. 비엔나는 자전거의 도시이기 전에 음악의 도시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모차르트에 이르기까지 웬만큼 이름난 음악가라면 전부 비엔나를 거쳐 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의 흔적을 찾는 건, 비엔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고요한 바람이 분다. 비엔나엔 비엔나만의 속도가 있다. 사람들은 그걸 '비엔나 템포'라 부른다. 낙엽의 낙하 속도. 바람이 살갗에 닿는 속도. 초승달이 부푸는 속도. 세상의 리듬보단 반 박자 느리게. 딱 그만큼의 속도가 비엔나 템포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어, 여행의 템포도 비엔나에 맞추기로 했다. 비틀거리던 자전거 핸들이 잠잠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빈모빌 이용 방법
1. 'nextbike' 앱에서 회원가입 후 결제 수단을 입력하고 자전거의 QR 코드를 스캔하면 뒷바퀴 위의 프레임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열리며 자전거가 대여된다.
2. 회원가입을 하려면 현지 번호가 필요하다. 현지 유심칩을 끼워 사용하는 걸 추천.
3. 대여와 반납은 24시간 가능하다. 대여한 자전거는 공식 대여소 또는 플렉스존(Flexzone)에서 유연하게 반납할 수 있다. 이외의 영역에 반납할 경우, 최소 20유로의 서비스 요금이 청구되니 주의할 것. 대여소 및 플렉스존 위치는 앱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쇤브룬 궁전 내부 등 일부 관광지에선 자전거 탑승이 제한된다. 입구에 자전거 금지 표지가 있는지 잘 살피자.
●여름을 머금은 호수
11월은 마른 달이다. 헐벗은 1과 앙상한 1이 만나는, 건조한 바람이 부는 달. 나무가 잎을 털어 내고, 모래가 차갑게 굳어 가는 달. 그런데 노이지들러 호수(Neusiedl am See)의 가을은 느렸다. 나뭇잎은 풍성했고, 모래는 말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더니. 끝자락만 겨우 물든 낙엽처럼, 호수는 여전히 여름을 머금고 있다.
반창고 붙인 손가락을 보고 '너, 여기 왜 그래?' 하고 물어봐 주는 정도의 온기. 나는 그것이면 사는 데 충분한 온기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히 그만한 온기가 호수에 있었다. 노을빛이라든지 산책 나온 강아지의 발자국 같은 것들이 그랬지만, 실제로 수온이 따뜻하기도 했다. 노이지들러 호수는 수심이 얕다. 가장 깊은 곳이라 해 봤자 1.8m밖에 되지 않는다. 여름엔 특히 물이 금방 따뜻해져 아이들이 풍덩풍덩 옷을 벗고 뛰어들곤 한다고. 패러글라이딩하기 딱 좋은 바람의 세기, 낚싯대만 던지면 잡히는 물고기들. 600여 개의 카라반이 있는 캠핑 사이트까지. 비엔나 사람들의 숨은 아지트가 되기엔 충분한 조건이다.
보트 위에선 생일인지 결혼인지 모를 파티가 한창이었다. 샴페인 든 잔들이 수없이 부딪혔고, 선실은 웃음으로 출렁였다. 어쩐지 그들, 인생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This is how we live in Vienna(이게 우리가 비엔나에서 사는 방식이에요)." 호수 안내인의 말에 마음에 작게 파문이 인다.
저녁 어스름, 호숫가에 내려앉은 노랑은 맑고 우아했다. 비행운은 하늘에 흔적을 남겼다. 만족이 임계점을 넘으면 만족이 아니라 감탄이 된다는데. 나는 비엔나의 나무, 비엔나의 물결, 비엔나의 사람 같은 것들에 감탄했다. 만족이 감탄을 낳고, 감탄은 감동을 낳았다. 온기를 품은 활기, 활기가 잉태한 웃음과 이야기들. 그런 것들이 모여 삶이 되는 거구나. 그렇게 또, 사는 법을 배웠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맥아더글렌 디자이너 아웃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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