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저의 시작, 비엔나가 알려 준 '사는 법'
자전거로 구시가지를 달리고 선선한 날이면 아웃렛에서 후회 없는 쇼핑을 했다. 두 달치 월급이 순식간에 증발해도 마냥 설레기만 했던 날들. 비엔나가 알려 준, 사는 법.
●길티 플레저의 시작
남은 여비를 계산하고선 남몰래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를 굽어살펴 주소서!' 그러자 지름신이 응답했다. "구찌가 반값인데?" 지갑 사정은 사정없이 위태로워졌다. 말 그대로, '신들린' 쇼핑이 시작된 거다. 판도르프 아웃렛(McArthurGlen Designer Outlet Parndorf)에서의 일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니. 기껏해야 스웨터 한 벌 정도만 살 요량이었건만, 1시간 만에 기진맥진해 야외 의자에 털썩. 휘유, 넘쳐나는 쇼핑백으로 두 손이 모자라다. 근데 이상하다. 자릿수가 무섭게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간다. 비워지는 '텅장'만큼 채워지는 만족. 그러니까, 영어로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즐기는 행동인 건데. 돈을 절약하고, 돈에 집중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는 대신 돈을 낭비하고, 시간을 하대하며 살아도 된다고.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그래도 된다고. 구찌가, 프라다가, 버버리가, 차례로 면죄부를 준다.
탕진이니 파산이니 하는 단어들은 판도르프 아웃렛에선 부정보다 긍정에 가깝다. 소비자는 죄가 없다. 다만 후회만 있을 뿐. '그거 살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질구레한 계산 따윈 애초에 접어 두는 게 현명하다. 어차피 뭘 사도 이득, 돈 쓰고도 돈 버는 느낌이니까.
일단 웬만한 브랜드들의 가격이 한국보다 저렴하다. 특히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랜드라면 더더욱. 동일한 제품을 그 자리에서 한국 사이트에 검색하면 가격 차이가 2배 가까이 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제값 주고 사서 중고시장에 팔아도 이득일 거란 말은 단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안 그래도 연중 30~70% 할인된 금액을 선보이는데, 여기에 10% 추가 할인을 해 주는 '패션 패스포트(Fashion Passport)'를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지급 받으면 할인율은 대폭 늘어난다. 택스리펀까지 알뜰하게 챙기고 나면, 망설이다 두고 나온 제품들이 아른거려 이마를 짚게 된다.
명품이 부담스럽다면 타미힐피거나 캘빈 클라인처럼 비교적 가격 문턱이 낮은 브랜드를 노리는 것도 방법이다. 입점 브랜드 수만 160개니, 가격대도 선택지도 그만큼 다양하다. 어쩐지 타 아웃렛에 비해 유독 한국말이 자주 들리더라니. 빌레로이 앤 보흐, 스와로브스키 등 주방 제품과 주얼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판도르프 아웃렛의 한국 관광객 매출이 맥아더글렌 26개 센터 중 1위를 차지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당장 나부터도 열리는 지갑을 막을 길이 도저히 없었으니 말이다.
▶쇼퍼홀릭들의 성지
맥아더글렌 디자이너 아웃렛
쇼핑의 길은 맥아더글렌으로 통한다. 여행객들 중 '득템의 찬스'를 노리는 이들은 반드시 맥아더글렌을 거치기 때문. 맥아더글렌 그룹은 유럽과 북미에 총 26개 디자이너 아웃렛을 소유, 개발 및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패션 유통 기업이다.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 및 하이 스트리트 패션을 연중 30~70% 할인된 가격에 제공해 쇼퍼홀릭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스페인 남부에 말라가 아웃렛과 영국 웨스트 미들랜드 아웃렛을 성공적으로 오픈했고, 곧 프랑스 파리와 노르망디 근교에도 새로운 아웃렛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는 재미, 사는 재미
소비가 낭비의 문턱을 넘는 건 판도르프 아웃렛에선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이제 그만 두라는 머리의 명령을 '흥!', 다리가 가볍게 무시한다. 이 매장에서 저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옷걸이 사이사이로는 셔츠, 자켓, 롱 코트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들키기 위해 숨어 있는 '숨은 그림'들처럼. 그때마다 나는 솜씨 좋은 술래가 되어 내 것이 될 녀석들을 쏙쏙 골라냈고, 두루마리처럼 길게 늘어진 영수증이 나의 승리(?!)를 증명해 줬다.
꼭 저렴한 가격 때문만은 아니고, 희소성 탓도 크다. 한국에서 못 보던 상품 라인이 많을 뿐더러 유러피안 스타일답게 색상 선택도 과감하고 화려하다. 크롭 기장의 깜찍한 프라다 바람막이와 빨강 파랑이 독특하게 배색된 타미힐피거 티셔츠를 구매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패션에 있어 합리적인 가격만큼 중요한 것이 개성 아니던가. 둘 다를 갖췄으니 품을 수밖에. 하물며 하리보 젤리도 그렇다. 비건 젤리를 비롯한 한정판 젤리들이 1유로대의 착한 가격을 뽐내며 구매욕을 자극한다. 한 매장에서 75유로 이상만 구매하면 택스리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조차 거절하기 어렵게 유혹적이다.
두 손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두 다리도 운동을 멈췄다. 핸드폰 만보기 앱에 찍힌 숫자는 2만3,000. 발바닥이 뻐근하다. 손목이 아린다. 두 달 치 월급이 고스란히 증발됐다. 그리고 따라오는 거대한 '플레저(pleasure)'. 쇼핑백을 하나하나 열어 볼 때마다 새 지갑을 든 나, 새 가방을 멘 나, 새 스웨터를 입은 내가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나'들이 보낼 한국에서의 일상이 보인다. 그 속의 내가 퍽 즐거워 보여 좋다. 오랜만에 느끼는 순수한 설렘이다. 사는(buy) 재미와 사는(live) 재미가 번갈아 스치는 순간. 진정한 소비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 아니겠냐고, 판도르프가, 비엔나가, '사는 법'을 알려 주는 듯했다.
●MUST EAT ITEMS
IN PANDORF OUTLET
쇼핑 에너지를 빵빵하게 채워 줄 판도르프의 먹거리들
단쓴단쓴의 조합
자허 카페 Sacher Cafe
비엔나 여행객들은 누구나 한 번씩 들른다는, 그 유명한 자허 카페. 시내에서는 몇 시간씩 줄 서서 먹어야 하지만 판도르프 아웃렛에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인기의 이유는 '자허 토르테(Sacher Torte)'라 불리는 초콜릿 스펀지 케이크에 있다. 목구멍이 따끔거릴 만큼 달달한 케이크와 신선하고도 씁쓸한 에스프레소, '단쓴단쓴'의 조합. 비엔나의 맛이다.
아시아 음식이 그립다면
와가마마 Wagamama
거두절미하고, 김치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와가마마의 가치는 이미 별 5개 이상. 한식당이 아닌, 퓨전 일식 레스토랑이지만 한국인 입맛에 꼭 맞는 음식들을 판매한다. 특히 라멘과 덮밥류가 기대 이상이다. 어디 한식만 하겠냐만, 호로록 넘긴 라멘 국물엔 어김없이 오장육부가 편해진다. 그래, 이 맛이지. 아시아 음식이 그리운 이들에겐 한 줄기 빛과 같은 식당.
간단한 요깃거리로
노드씨 Nordsee
노드씨는 해산물 레스토랑이다. 새우 커틀릿이며 연어 스테이크며 각종 신선한 해산물들을 맛있게 요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곳이지만, 사실 제일 인기 있는 건 샌드위치다. 바삭한 바게트 빵 사이로 생선튀김이나 참치 등이 올라가 감칠맛을 더한다. 간단한 요깃거리로 딱인데 가격까지 착하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쇼핑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아깝다면 노드씨가 답이다.
▶Shopping Tips
효율적인 쇼핑엔 맵이 필수
이바 마리아 블로메트(Eva Maria Blommert) 맥아더글렌 판도르프 아웃렛 투어리즘 매니저
"판도르프 아웃렛은 위치가 곧 장점입니다. 비엔나 시내에서 아웃렛까지 셔틀버스로 40분이면 도착하고요, 비엔나 국제공항에서는 차로 약 30분이 소요돼요. 공항 가기 전 아웃렛에 들러 쇼핑하는 고객들도 많다는 뜻이죠. 판도르프 아웃렛은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웃렛으로 알려져 있어요. 한국인 방문객들의 비중이 높다 보니,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한국어 가이드 맵을 찾아보실 수 있죠. 쇼핑 전에 맵을 보고 루트를 짜면,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후회 없는 쇼핑을 하실 수 있습니다. 참,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아요. 일요일은 신성한 날로 생각해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습니다. 판도르프 아웃렛도 일요일엔 운영하지 않으니, 여행 계획 세울 때 유의하세요!"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맥아더글렌 디자이너 아웃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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