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 전성시대’ 왔지만…‘세련된 짜깁기’는 역부족
한국은 에스에프(SF)의 불모지였다. 오랫동안 한국 에스에프 문학 팬들은 오프라인에서건 온라인에서건 왜 한국에서는 에스에프가 이다지도 인기가 없는가를 두고 한탄했다. 해외 에스에프 문학의 고전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번역 소개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다. 그럼에도 팬층은 한정적이었다. 영화 시장도 마찬가지다. 한국 시장에서 에스에프 영화는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시장을 지배했다. 전세계 박스오피스 역사를 바꾼 <스타워즈> 시리즈도 한국에서는 본토만큼의 인기는 없었다.
한국에서 에스에프 문학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2020년대부터다. 많은 출판사가 꾸준히 해외 에스에프 문학을 소개하는 동안, 새로운 세대의 국내 작가들이 ‘빛의 속도’로 등장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젊은 여성 소설가들이 이끌고 있는 에스에프 문학의 바람은 금방 지나갈 트렌드가 아니다. 에스에프에 그리 익숙하지 않던 기존 독자들이 이 장르를 본격적으로 껴안고 있다는 신호는 어디에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202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본격적인 에스에프 영화의 출발을 목도했다. 이용주 감독의 <서복>,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공개됐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과 배우 정우성이 제작한 시리즈 <고요의 바다>가 뒤를 이었다. 김용화 감독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 <더 문>,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는 곧 관객을 찾을 것이다. <벌새>로 영화계에서 가장 떠오르는 감독이 된 김보라는 김초엽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펙트럼>을 준비 중이다.
에스에프 불모지였던 한국은 왜 갑자기 이 낯선 장르를 사랑하기 시작한 걸까. 사실 나는 그것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할 참이다. 에스에프 장르가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온 국가들은 사실 꽤 한정적이었다. 미국, 유럽, 러시아와 일본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에스에프는 ‘선진국의 장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에스에프적 사유는 어떤 면에서는 꽤 배부른 사유다. 충분한 경제적 번영 위에서 과학기술의 변화를 선도해온 국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문화적 특권에 가깝다.
2020년대가 한국 에스에프 장르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 것은 한국이 모든 면에서, 특히 과학기술에 있어서 충분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문학과 영화는 현실 세계에서 충분한 사유를 할 만큼 해왔다. 이제 우리는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르면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물론 에스에프 장르가 우주만을 배경으로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이 장르 팬들이 에스에프를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 아니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다 있다. 에스에프는 외적 우주만큼이나 인간의 내적 우주를 탐구하는 장르다. 한국인은 이제야 외적 내적 우주를 상상력을 통해 들여다볼 충분한 지적 여유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에스에프 영화 제작 붐은 자본의 여유와 특수효과 기술의 발전과도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에스에프는 언제나 돈이 많이 드는 장르였다.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다. 그 동네에서 에스에프 영화가 B급 영화의 카테고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에스에프 영화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발전과 함께 메이저 장르가 됐다. 21세기의 디지털 특수효과 혁명은 이 장르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자본과 기술의 한계로 에스에프 장르를 시도하지 못했던 국가들이 예전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믿을 만한 디지털 특수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국은 마침내 자체적인 에스에프 영화를 만들어낼 기술적 단계에 이른 것이다.
한계는 있다. 한국 에스에프 문학은 여전히 ‘하드 에스에프’가 부족하다. 하드 에스에프는 기본적으로 ‘기존 과학, 혹은 아주 정밀하게 외삽(Extrapolation)된 과학’을 기반으로 사유를 펼치는 장르다. 그에 반해 ‘소프트 에스에프’는 과학적 사유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현실을 상상력을 통해 사유하는 소프트 에스에프 문학이 주류다. 나는 지금 하드 에스에프가 소프트 에스에프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영화에 있어서 하드 에스에프적 요소는 꽤 중요하다. 현존하는 과학이든 상상으로 창조한 미래의 과학이든 에스에프 영화는 최소한의 과학적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관객의 감성만큼이나 이성을 설득해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2022년 등장한 한국 에스에프 영화들은 지나치게 소프트하다. 할리우드 에스에프 영화들은 에스에프 문학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느 정도 합리적인 과학적 정합성을 기반으로 사유를 펼쳐왔다. <그래비티>와 <아바타>가 한국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어쨌거나 납득 가능한 과학적 토대를 상상해낸 덕분이다. 한국 에스에프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지점에서 실패한다. <고요의 바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청자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최소한의 과학적 이치도 신경 쓰지 않은 허술한 설정들을 비웃었다. 한국 에스에프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들의 문제는 할리우드가 수십년간 반복해온 주제와 소재를 게으르게 한국식으로 재현하기만 하는 데 있다.
오티티 시대의 새로운 관객들은 예전의 한국 영화 관객들과는 다르다.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를 비교적 잘 따라 했다는 이유만으로 칭찬하는 일은 더는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에스에프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 대답은 거대한 제작비를 들인 익숙한 할리우드 고전들이 아니라 덩컨 존스의 <더 문>이나 앨릭스 갈런드의 <엑스 마키나>처럼 ‘오리지널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저예산 에스에프 영화들에 있을 것이다. 좋은 에스에프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자본과 기술만은 아니다. 관객이 단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지적 사유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제작자 여러분은 놀라운 속도로 부상 중인 한국 에스에프 문학과 오랜 에스에프 문학의 고전들을 좀 더 읽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 에스에프 영화의 미래는 낡은 아이디어를 짜깁기한 장르 문외한들의 시나리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점의 에스에프 문학 서가에 있다.
글 김도훈 영화평론가 겸 작가, 사진 각 영화 배급사·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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