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승진 1년’ 정기선이 그리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비즈니스 포커스]
“자동차가 전기차·수소차로 바뀌면 앞으로 현대오일뱅크는 뭘 해야 할까. 그런 세상이 오면 유조선 시장은 어떻게 변하고 현대중공업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 세상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꼭 하고 있어야 할 사업은 무엇일까.”
정기선 HD현대·한국조선해양 사장이 2020년 말 출범해 그룹의 ‘신사업 돌격대’ 역할을 해온 미래위원회 태스크포스(TF)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했던 고민이다. 정 사장의 가장 큰 화두는 반세기를 맞은 현대중공업그룹을 먹여 살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일이다.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첨단 센서 등이 융합된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자율 주행 선박으로 태평양을 횡단하고 뛰어난 빅데이터 프로세싱 기술로 9·11 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의 은신처를 찾아낸 것으로 유명한 미국 팔란티어테크놀로지스와 손잡은 것도 그룹의 미래 준비와 연관이 있다.
이번 기사는 지난 9월 발간된 현대중공업그룹 창립 50주년 사사(社史)에 실린 정기선 사장의 인터뷰 내용을 일부 발췌해 구성했다.
HD현대, 사명 이어 CI 변경 추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 사장이 취임 1주년을 맞이했다. 정 사장은 2021년 10월 12일 지주회사인 HD현대(전 현대중공업지주)와 조선 부문 중간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하며 차기 총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정 사장이 이끄는 HD현대와 한국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먹거리와 주력 사업을 책임지는 회사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30여 년간 이어진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정 사장을 중심으로 한 오너 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역사를 돌아보면 지난 50년보다 최근 1년간의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컸다. 변화의 중심에 정기선 사장이 있다. 올해 현대중공업그룹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지주회사인 현대중공업지주 사명을 HD현대로 변경하면서 그룹의 정체성이었던 ‘중공업’을 떼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룹의 얼굴인 상징 체계(CI)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CI에서 범현대가가 사용했던 초록색과 황금색의 삼각형 모양이 전진하는 느낌의 화살표 모양으로 바뀌었다. 사명에서는 현재 사용 중인 ‘HD현대’에서 ‘현대’가 빠지고 ‘HD’만 표기됐다. 색상은 입체감을 반영한 초록색과 검은색 두 가지 버전이다.
특허 정보넷 키프리스에 따르면 HD현대는 지난 9월 새로운 CI 4개를 상표로 출원했다. 기존 삼각형 로고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57년 현대건설을 창립하며 도입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11월 경기 성남구 분당구 글로벌연구개발센터(GRC) 입주와 12월 비전 선포식 등에 맞춰 CI를 바꿀 것으로 알려졌다.
선박 회사 넘어 ‘퓨처 빌더’ 도약 선언
정 사장은 미래 먹거리인 수소·인공지능(AI)·바이오·헬스케어 등 신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을 조선업을 넘어 해양 모빌리티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보폭을 넓히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올해 처음으로 세계 가전 전시회(CES)에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정 사장은 직접 프레젠테이션(PT)에 나서 선박 자율 운항·로봇·해양 수소 밸류 체인 등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청사진을 공개했다. 보수적인 조선업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미래 지향적인 기술 중심 그룹으로 도약, 세계 1위 십빌더(ship builder)를 넘어 미래를 설계하는 퓨처 빌더(future builder)로 거듭난다는 목표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5월 정 사장이 CES에서 발표한 청사진을 실현할 중·장기 투자 계획도 내놓았다. 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분야로 친환경 전환과 디지털 전환을 낙점하고 향후 5년간 사업 경쟁력 강화에 12조원, 친환경 연구·개발(R&D)에 7조원, 디지털 전환에 1조원, 제약·바이오에 1조원 등 모두 21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처음엔 우리도 자율 운항 기술을 가지고 있는 벤처 회사가 있으면 인수하려고 많이 만나 봤는데 배와 운항에 대해 너무 몰라 놀랐습니다. 그 이후 ‘이건 우리가 할 수밖에 없겠구나,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비커스는 그렇게 탄생된 회사입니다.”
자율 운항 선박은 전통적 노동 집약적 산업인 조선 산업의 경쟁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가격 경쟁에서 기술 경쟁으로의 전환이다. 2020년 12월 현대중공업그룹의 1호 사내 벤처로 출범한 아비커스는 ‘정기선식 혁신’을 상징한다. 정 사장 주도로 설립된 아비커스는 2021년 한국 최초로 선박 완전 자율 운항에 성공했다.
지난 6월에는 세계 최초로 대형 선박을 자율 운항해 태평양 횡단에 성공했다. 정 사장은 자율 운항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CES에서 그는 “전 세계 유명 스타트업들을 만나 봤는데 현대중공업보다 자율 운항을 잘하는 회사를 찾기 어려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해양 부문이 고부가 가치 선박 수주 실적에 힘입어 한국 조선사 중 가장 먼저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면서 정 사장의 신사업 행보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 부문 중간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3분기 영업이익을 1888억원 올려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빈 라덴 잡은 美 빅데이터 기업 손잡고 DT 혁신
“사실 조선·해양의 디지털화는 최근의 이슈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배들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고 이미 많은 정보통신기술(ICT)이 접목됐습니다.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겁니다. 디지털 전환(DT)의 또 다른 측면인 스마트 조선소에도 계속 투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룹이 가면 바로 길이 됩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DT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빅데이터 기업인 미국 팔란티어테크놀로지스와 손잡고 조선·해양·에너지·산업 기계 등 핵심 사업의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에 들어갔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해양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초로 2030년까지 스마트 조선소로 전환하기 위한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설계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이 실시간으로 연결돼 스마트한 작업 관리가 가능한 조선소를 구축할 예정으로, 이 과정에 팔란티어테크놀로지스의 빅데이터 플랫폼이 도입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고성장 중인 헬스케어·바이오 분야도 정 사장이 낙점한 미래 먹거리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21년 하반기 투자 전문 자회사인 현대미래파트너스를 통해 모바일 헬스케어 서비스 기업인 메디플러스솔루션을 인수했다. 지난해 12월 ‘암크바이오’라는 법인을 설립해 신약 R&D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정 사장이 신사업 성과를 중심으로 그룹 내 입지를 확대하고 있지만 지배력 확대를 위한 지분 확보는 넘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주회사인 HD현대가 한국조선해양·현대제뉴인·현대오일뱅크 등의 주요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HD현대의 지분은 정몽준 이사장이 22.6%, 정 사장이 5.26%를 보유하고 있다. 정 사장이 지분율을 늘리기 위해서는 직접 주식을 매입하는 방법과 부친의 지분을 증여받는 방법 등이 있다. 이때 필요한 최소 70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 재원 마련이 과제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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