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사건의 지평선' 지금 1순위야…역주행 이유 푸는 '비밀번호 486'
기사내용 요약
발매 약 7개월 만인 2일 기준 멜론 톱100 2위까지
우주 소재 노래들로 '천문학 가수' '이과 언니'로 통하며 열풍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그 너머의 관찰자와 상호작용할 수 없는 시공간 경계면을 뜻하지만, 국내 대중음악계에선 청자가 좋은 노래와 언제나 상호작용할 수 있는 용어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에리브릴 라빈 혹은 한국의 앨러니스 모리세트의 귀환이다. 싱어송라이터 윤하(34·고윤하)의 경쾌한 포크 모던 록 풍의 '사건의 지평선'이 발매 6개월 만에 음원차트에서 역주행하며 열풍을 일으키더니, 7개월 만에 차트라는 마천루의 꼭대기까지 점령할 기세다.
지난 2일 기준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론에서 톱100 2위까지 찍은 '사건의 지평선'은 막강한 뒷심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같은 날 지니에선 1위, 플로(Flo)에서 3위를 차지했다.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 200'에 진입하며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4세대 간판 걸그룹 '(여자)아이들'((G)I-DLE)의 '누드'와 '르세라핌(LESSERAFIM)'의 '안티프래자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사건의 지평선'에 대한 심상치 않은 반응은 지난 9월 여러 대학축제에서 조짐이 보였다. 블랙홀의 경계인 사건의 지평선, 즉 예측되지 않는 이별 그 너머의 이야기를 그린 곡. "좋았던 날의 안녕·새로운 시작의 응원"을 담아 경쾌함 속에서도 어딘가 아련함이 묻어났고 이런 점이 MZ세대의 아날로그 감수성을 자극했다. 이후 음원 플랫폼 스트리밍으로까지 번졌다.
'사건의 지평선'은 윤하가 지난 3월 발매한 정규 6집 리패키지 앨범 '엔드 시어리 : 파이널 에디션(END THEORY : Final Edition)' 타이틀곡이다. 숏폼 플랫폼인 틱톡의 시대에 2분대의 K팝 아이돌 댄스곡이 음원차트를 장악한 상황에서 5분1초짜리 대곡으로 차트 장기집권에 돌입한 모양새다. 청취자 사이에서 "나에겐 우리가 지금 1순위야"('사건의 지평선' 노랫말)가 된 거다. 국내 데뷔 17년차(일본 데뷔로 따지면 19년차)의 탄탄한 내공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4 = '이과 언니'의 4차원의 고찰
사실 '사건의 지평선' 이전엔 대중은 윤하하면 '비밀번호 486' 외에 '우산', '빗소리' 등 비(雨)와 관련된 연작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건의 지평선'이 윤하를 우주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사건의 지평선'과 함께 언급되는 윤하의 이전 곡은 '혜성'이다. 윤하의 일본 정규 1집 '고 윤하(Go! Younha)'(2005)의 한국어 버전인 1.5집 타이틀곡. 이 곡으로 윤하는 일찌감치 일본에서 '오리콘의 혜성'으로 통했다. 아이돌과는 다른 결로 K팝 붐을 이끌었다. 이처럼 초창기부터 우주와 연관성을 맺어온 윤하는 이번 6집과 6집 리패키지에 '별의 조각', '살별', '블랙홀(Black hole)' 등 우주 연작이라 불릴 만한 곡들을 대거 담으며 앨범 기획에 대한 구심력을 보여줬다. 이 덕분에 일부에선 윤하를 '천문학 가수' '이과 언니' 등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공감을 얻은 건 이과 감성의 기반에 깔려 있는 서정적 감수성이다. "아스라이 하얀 빛 /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 새로운 길 모퉁이"라는 '사건의 지평선' 가사가 보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2014)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쿠퍼'(매슈 매커너히) 일행은 우주선을 타고 가다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에서 위기를 겪는다. 그런데 블랙홀의 특이점(singularity)에 5차원의 공간이 있고, 그 속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영화는 만들어내며 호응을 얻었다.
윤하의 노래 속 시간은 5차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4차원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3차원이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4차원이 만들어진다. 윤하의 록 음악엔 아련함, 즉 지나간 시간의 향수가 묻어난다. '사건의 지평선'은 그렇게 모든 시작에 끝 또는 모든 끝에 시작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엔드 시어리(End Theory)' 연작의 마침표를 찍은 곡이다. 시간을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했다고 볼 수 있다. 윤하의 음악이 우리를 젊은 시절로 데려가는 '청춘의 일기장'으로 통하는 이유다.
8 = 팔방미인
이번 6집 연작에서 작곡·편곡 부분에 JEWNO(손준호), 제임스 손, 숀(SHAUN), 권순일(어반자카파) 등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사건의 지평선'을 비롯 상당수의 곡에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고 상당수 곡은 단독 작사했다. 이와 같은 점은 음반 전반의 콘셉트를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탄탄한 서사를 가진 한편의 소설로 여겨도 될 만한 완성도를 갖출 수 있게 했다.
6 = 육감
하지만 데뷔 초부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영리하게 작업하며 발휘해온 식스 센스, 즉 5감이 파악하지 못하는 육감을 업계에서 인정 받아왔다. 에픽하이가 '우산'의 피처링 가수로 윤하를 택하고, 글로벌 수퍼그룹 '방탄소년단'(BTS) 리더 RM(김남준)이 윤하의 '윈터 플라워(WINTER FLOWER)'를 피처링한 이유다.
또 사실 윤하의 역주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에 발표한 국내 데뷔 싱글 '오디션(Audition)'에 실린 곡이자 윤하가 작곡한 '기다리다'가 톱 가수 겸 배우 아이유가 2015년 KBS 2TV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불러 역주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한류 개척자 보아(BOA)의 팬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윤하는 가수 백아연이 "가장 영향 받은 뮤지션"으로 꼽는, 후배들의 롤모델로 통하기도 한다. 국내 대중음악업계 든든한 허리가 됐다.
'사건의 지평선' 역주행 이후 새삼 이런 윤하의 진가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재주목 받고 있는 건 가창력이다. 청량하고 시원한 동시에 아련함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로, 흔들림 없이 음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다시 증명하면서 록 음악에 어울리는 보컬이라는 인장을 또 분명하게 찍었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는 "'사건의 지평선'이 축제 등에서 입소문이 났지만 원래 좋은 노래가 라이브에서 빛을 발한 것"이라면서 "사실 노래 자체의 난이도가 높은데 유튜브 등에서 커버하는 가수들이 그 난이도를 연달아 인정하면서 주류가 된 경우"라고 짚었다.
윤하의 신드롬은 연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연말 콘서트다. 윤하는 오는 12월 2~4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c/2022YH'를 펼치는데 3일 공연 모두 일찌감치 매진됐다. 이제 관객들은 '비밀번호486'만을 기다리는 게 아닌, '사건의 지평선'을 비롯 6집 연작에 실린 다양한 곡들도 기대하는 만큼 세트리스트 구성에도 유연성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건의 지평선'은 과소평가됐던 윤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본질적인 차원을 보여주는 좋은 뮤지션과 좋은 노래는 언제든 시공간의 경계면을 통과해 청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윤하는 최근 소셜 미디어에 역주행 열풍과 관련 "어차피 하던 걸 계속할 뿐이라서 별 다를 것 없지만서도, TV에 초청돼서 노래하고 무엇보다 우리 홀릭스 어깨 펴지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 참 행복한 일이군요. 자 오늘도 세상을 구하러 갑시다"라고 적었다.
김도헌 평론가는 "'사건의 지평선'은 윤하 노래 중에도 손꼽히는 곡이다. 처음 나왔을 때 대중의 반응이 크지 않아 의아했었다. 윤하의 초창기로 돌아간 듯한 테마와 문학적인 가사, 멜로디의 흡입력, 탄탄한 실력 그리고 아이디어가 결국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아이돌 K팝과 차별성을 갖고 가요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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