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 이찬혁을 응원한다
1997년 2월15일 MBC <인기가요 BEST 50>에서 밴드 삐삐롱스타킹은 한국 방송 역사상 손꼽히는 사고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기억될 만한 이벤트를 만들었다. ‘바보버스’를 부르면서 보컬 고구마가 카메라에 손가락욕을 했고, 기타리스트 박현준은 침을 뱉었다. MBC는 곧바로 이들을 출연정지시켰지만, 밴드가 곧 해산했기에 출연정지 조치는 별 의미가 없었다. 멤버들은 각자 다른 밴드를 결성하거나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유유히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유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있는 가사(“잘난 척 하지마 똑바로 살아봐 첨으로 돌아가 단추를 풀어봐 … 주위를 둘러봐 빗자루 한마리 쓰레기 두마리 짜증날 것 같아요”), 경기 들린 듯한 무대 매너는 이날의 사고가 ‘의도된 파국’이었음을 암시한다. 지금보다 연예계에 미치는 지상파 방송사의 권력이 훨씬 강한 시절이었다. 이 3인조 펑크 밴드는 그 권력 핵심부의 내파를 시도했던 것이다.
25년 전 삐삐롱스타킹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건 가수 이찬혁이다. 동생 이수현과 함께 결성한 듀오 악동뮤지션(후에 ‘악뮤’로 개칭)으로 2013년 SBS <K팝 스타>에서 우승하며 데뷔한 이찬혁은 최근 첫 솔로 음반 <에러>를 내놨다. <에러>는 사전 홍보 방식부터 독특했다. 이찬혁은 서울 광화문 길거리에 소파를 내놓은 채 앉아있거나, 좁은 유리 부스에 들어가 버스킹을 하고, EBS 어린이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에 출연해 김밥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흥미로운 무대로 대중에게 어필
이찬혁이 본격적으로 음악방송에 출연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솔로 데뷔 무대였던 엠넷 <엠카운트다운>에서 이찬혁은 ‘ERROR’라고 쓰여진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 두 진행자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진행자는 “솔로로 데뷔해서 기쁘다” “무대에서 직접 확인해달라” 등 이찬혁의 답을 추측해서 대신 답했다. 이찬혁은 무대에 나와서도 끝까지 객석을 등지고 노래했다. SBS <인기가요>에서는 미용사를 대동해 노래 한 곡이 끝나는 동안 삭발을 했다.
일각에선 그의 퍼포먼스가 ‘무례하다’고 평하지만, 삐삐롱스타킹에 비하면 이찬혁의 무대는 ‘순한 맛’이다. 하나마나한 뻔한 말을 하고, 의상만 조금 다를 뿐 똑같은 무대를 선보이는 대신, 이찬혁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곡 무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음악이 좋지 않았다면 정말 ‘논란’에 그쳤을 수도 있다. <에러>는 순도 높은 팝음반이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음을 눈앞에 둔 화자가 “이렇게 죽을 순 없어”라고 안간힘 쓰다가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린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5단계,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과정을 보여주듯 노래들은 신경질적이고 우울했다가 끝내 평화로워진다. 창작자의 의도와 실천이 매끈하게 맞물린다.
악뮤 시절부터 그를 좋아해온 팬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팬들의 투표로 우승하며 데뷔했기에, 팬의 반응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데뷔 10년이 된 이찬혁은 팬들의 기대에 안주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겸손하게 예쁘게 잘 보이겠다’는 말로 내 삶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하는 일이 맞다면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겠다’고 생각했다.”(<에러>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
이찬혁은 지난해에도 흥미로운 무대를 연출한 적이 있다. 엠넷 <쇼미더머니 10>에서 참가자 머드 더 스튜던트를 위한 피처링 가수로 나와 ‘불협화음’을 노래했을 때다. 노래가 절반쯤 흐른 뒤 등장한 이찬혁은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이건 하나의 유행 혹은 TV쇼(…)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망치는 중이야”라고 노래했다. 가장 인기 있는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 현재 한국 힙합의 흐름과 프로그램 자체를 ‘디스’한 것이다.
위험 감수하고 근사한 도전 선택
방송사와 팬이 원하는 일만 해서는 큰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때로 시스템에 도전하고 팬의 기대에 어긋날 때 무언가 근사한 것이 탄생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하거나 몰락할 수도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근사함에 도전할 것인가, 안전하게 지루할 것인가. 이찬혁은 용감하게도 전자를 택했다. ‘불협화음’의 마지막 가사는 이렇다. “똑같은 것들 사이에 튀는 무언가. 동그라미들 사이에 각진 세모 하나. 우린 그걸 작품이라고 불러 친구야. 쟤들은 아무것도 몰라.”
백승찬 문화부장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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