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사진, 우표 이어붙인 책 “오빠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영관 기자 2022. 11.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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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 ‘녹스’ 번역 출간
노벨상 단골 후보 캐나다 시인
죽은 오빠 애도하며 만든 책
독자가 감정 체험하도록 유도
‘녹스’를 담은 상자의 모습. 앤 카슨은 “나는 책의 형식으로 그(오빠)를 위한 묘비명을 만들었다”고 했다. /봄날의책

한 소년의 흑백 사진이 회색 상자 앞에 있다. 관(棺)을 연상시키는 상자의 뚜껑을 열자, 수백 장의 종이가 쏟아져 나온다. 하나로 이어진 종이에 찢어진 사진, 우표 등 소년의 흔적과 누군가의 메모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소년의 묘비명을 종이에 옮겨 놓은 듯한 책.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봄날의책)에 관한 설명이다.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글을 번역하고, 그것을 현대 문학에 접목하는 실험적 기법으로 독보적 위치에 있다. 그리핀시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종종 거론되며 국내에 알려졌다.

이번 책은 그가 오빠를 애도하며 만든 것이다. 그의 오빠는 마약 거래 등 혐의로 해외를 떠돌다 22년 전 죽었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다 먼저 죽었다. 카슨은 그런 오빠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죽은 이의 모습은 실제에 완벽히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삶을 기록하며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중심, 하나의 역사, 납득되는 하나의 사연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 과연 그런가?”

카슨은 ‘번역’이란 키워드를 통해 애도의 방법을 설명한다. 책은 두 죽음에 대한 비가를 번갈아 보여준다. 오빠에 관한 기록들, 그리고 로마 시인 카툴루스가 형제를 추모하며 읊은 시. 그가 고등학교 시절 라틴어 수업에서 처음 읽었을 때부터 사랑했지만, 제대로 번역할 수 없던 시다. 비로소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 번역한 시의 해석에는 라틴어 ‘녹스(nox)’가 뜻하는 밤의 이미지가 잇따라 등장한다. 단어를 그대로 번역한 듯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오빠의 죽음을 뜻하는 ‘밤’의 이미지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나는 번역이란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 더듬거리는, 아주 모르는 방은 아닌, 하나의 방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인간의 말에는 중앙 스위치가 없다.”

카슨은 독자가 애도의 감정을 직접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너는 누구였는가.” “눈물을 지닌 자는 그러도록 하라.” “나는 네가 그곳에서 보내는 추위의 계절이 궁금해”와 같은 메모를 책 곳곳에 담았다. 종이의 뒷면은 백지다. 독자들이 빈 종이를 채우며, 애도의 경험을 해보라는 취지. 책을 옮긴 윤경희 번역가는 “카슨은 자신의 개인적 사건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이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

“원본을 최대한 살려달라”는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아코디언북 형태를 재현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펼치면 병풍과 같은 모양. 기계 제작이 어려워 프랑스어·일어 등 주요 언어권에서 번역되지 못했다. 초판 1500부를 손으로 풀칠해 제본하는 데에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국내 번역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를 펼친 모습.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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