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걷는 이 시대 순례자…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서울=연합뉴스) 임지우 기자 = 구원과 깨달음을 원하는 순례자들이 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걸을 때, 홀로 동쪽 시베리아 끝으로 가는 순례자가 있다. 거꾸로 걷는 그의 순례길은 전 세계인의 관심사가 되고, 오호츠크 해상의 기후탐사선에서 일하는 기후연구원 'AA'(에이에이)와 'BB'(비비)는 위성 레이더를 통해 그를 지켜본다.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외로이 일하는 두 연구원은 이 순례자가 걷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사소하지만 실존적인 질문들을 주고받는다.
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팬데믹과 기후 위기 등 전 지구적 위기에 처한 인류가 겪는 실존적 고민을 담은 부조리극이다.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젊은 연극상을 받은 작가이자 연출가 정진새의 신작으로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졌다. 지난달 20∼23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먼저 공연한 뒤 이번에 서울 관객과 만난다.
작품을 쓰고 만든 정진새 연출은 2일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작품 시연을 마치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을 거치며 많은 사람이 느꼈을 구원과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그간 인류가 쌓아온 믿음과 문명의 유효성을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2020년 그 이후 언젠가'를 배경으로 한 작품 속 세계에선 산티아고 순례길을 온라인상의 캐릭터를 통해 걷는 온라인 관광 상품이 유행한다. 온라인으로 순례길을 걷고 그 답례로 '천국'을 얻어내던 유저들은 거꾸로 산티아고에서 출발해 동쪽을 향하는 한 캐릭터를 발견하고 곧 그 순례자가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도 똑같이 걷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순례길에 열광한 대중은 이를 반영한 또 다른 온라인 현실을 만들어내고, 순례길을 둘러싸고 뒤엉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현실은 점점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정진새 연출은 팬데믹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하반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부터 '온라인 여행'을 키워드로 한 희곡을 요청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됐다.
정 연출은 "온라인 현실이 무한하게 확장하던 팬데믹의 세상이 아득하고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현실 중에 무엇이 낫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온·오프라인의 뒤섞임과 혼란을 연극 예술가로서 증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썼다"고 설명했다.
순례자를 지켜보는 임무를 맡은 두 기후 연구원이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는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적인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킨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대표되는 부조리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만들어진 희곡 장르로, 논리적이지 않은 서사와 파편적인 대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를 그린다.
"팬데믹이란 전 지구적 위기를 거치며 세계대전 이후와 비슷한 상황이 예술가로서 내게도 온 것 같다"는 정 연출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이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연상시키듯, 지금 시대에는 기후 위기를 누구보다 크게 느끼고 있을 기후 연구원들의 대화에서 그 부조리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순례자가 걷는 길은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도시 '마가단'으로 향하는 '콜리마'라는 이름의 도로다. 이 길은 스탈린 독재 시절 유배를 당한 정치범들의 강제 노역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뼈 위의 도로'라고도 불리는 길을 걷는 순례자의 모습은 그간의 인류 역사의 부조리함과 참혹함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떠올리게 한다.
정 연출은 "'온라인 여행'이란 키워드에서 밝은 여행보다는 팬데믹 현실을 반영한 어두운 다크 투어를 떠올렸다"며 "콜리마 대로라는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유형지를 발견해 이를 배경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구원에 대한 믿음을 주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후 위기로 불타고, 순례자는 마침내 동쪽 끝에 도달한다. 분명한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게 모호해진 현실에서도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닌 이 시대의 순례자. 그가 우주로부터 불어온 바람인 오로라를 지켜보며 하는 기도는 같은 의무를 지고 있는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다. "죽고 싶진 않지만, 살아있다는 것의 허전함을 그만 느끼고 싶다"고.
wisef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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