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품 지리산 자락이 알려준 인생의 해답

한겨레 2022. 11. 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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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지리산 실상사 농사 일기②
전북 남원 실상사 인근 지리산. 강부미 선생 제공
1회에 이어짐
이 글은 실상사 템플스테이에 매달 참여하면서 수행일지를 쓴 강부미 초등학교 교사가 쓴 것으로, 법인 스님이 소개합니다.

◆ 6월, 농사일 수행

이곳은 실상사 농장이다. 평상에 앉으면 작은 허브 정원에 나비들이 날고, 대나무로 만든 풍경 소리가 평화로운 곳. 뱀사골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다정하고, 눈 닿는 곳 어디나 논과 밭이 오손도손 펼쳐진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다.

지난 5월에 만난 8살 선재는 공동체 식구들과 손 모내기를 했다고 자랑했다. 부끄러웠다. 한평생 매일 밥 먹고 살면서 농사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을 깨달은 적이 없다니, 당연하게 생각했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바쁜 일정을 접고 주말 실상사 농장으로 향한다. 흙을 밟고, 흙에 파묻혀 일하고 싶다. 해봐야 한다. 답답한 농사일 초보자에게 농장지기 짱짱님은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다. 마늘종 끝부분을 잘라내고, 양파를 캔다. 고추밭에 지지대를 세우고, 참깨밭 잡초를 뽑는다.

가슴이 벅차다. 그 누구에게라도 지금, 이 순간 말해야겠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흙 위로 올라온 양파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래,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오롯이 진심이니 너는 잘 들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말로만 자연과 농부들께 고마워했구나. 어떤 일도 쉬운 일이 없구나. 그 어떤 일도 거룩하지 않은 일이 없구나. 그동안 나는 손끝으로, 머리로, 눈으로, 입으로만 일했구나.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았구나. 양파가, 마늘이, 고추가, 참깨가 그냥 거기 있는 줄 알았구나. 클릭하면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장보기 모니터 안에서, 집 앞 슈퍼마켓 진열대에 일회용 비닐 팩에 담겨서, 당연하게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었구나. 온몸 흠뻑 땀 흘려 일한 적이 없었구나. 지렁이, 개미, 무당벌레, 땅속 미생물들을 허리 숙여 자세히 본 적이 없었구나. 이것이 도법 스님 책에서 읽은 바로 그 인드라망이구나.”

여든을 훌쩍 넘긴 공양주님이 밭으로 오신다. 공동체 식구들 저녁 공양에 올리실 채소를 소쿠리 가득 담아 가신다. 해 저무는 실상사 오후가 완벽하게 평화롭다.

산내 공동체 식구들이 주시는 것을 넙죽넙죽 받기만 하는 이상한 체험학습이다. 농사일 초보 ‘일 동무’해 주시고, 맛있는 차와 유쾌한 담소 주시고, 공동체 식구들 자연과 함께 건강하게 사는 모습 보여주시고, 직접 담그신 귀한 매실과 간장 챙겨주시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갖게 해 주시고…. 늘 이렇게 받기만 하니, 이를 어쩌나…. 산내 여름은 점점 깊어간다.

학교로 돌아오니, 급식 시간에 매일 가득가득 넘쳐나는 잔반통이 보인다. 교육의 장에서 우리 교사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교육은 보고 배우는 것인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실상사 공양간 식사 기도문을 떠올리고, 우리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바꿔본다.

‘해, 구름, 바람, 비, 흙…, 진짜 진짜 고마워. 정성 들여 길러주신 농부님들, 어부님들 고맙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신 급식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부모님 고맙습니다. 꼭꼭 씹어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전 학년 수업을 모두 들어가는 덕분에, 400여명의 아이들과 가깝게 지낸다. 농사일 체험하는 내 사진은 아이들에게 신선했고, 넘치는 잔반통 사진과 깨끗하게 비운 식판 사진으로 아이들을 독려한다. 자발적으로 동참할 아이들은 서명을 하고, ‘잘 먹겠습니다. 오늘부터 1일~’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내게 정말 감명 깊었던 ‘공양게’ 문구도 어설프지만 아이들 언어로 바꿔본다.

“오늘 나에게 온 음식은 고마운 자연과 많은 사람의 땀으로 만들어진 정성 가득한 선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 선물’을 남김없이 먹어요!”

“선생님, 진짜 농부였어요?

“선생님, 우리가 급식 시간에 먹은 거 전부 다 선생님이 농사지은 거예요?”

실상사 전경. 강부미 선생 제공
실상사. 강부미 선생 제공

◆ 7월, ‘꿈 깨는 인생 학교’

지리산이 위태롭다. 매일 저녁 실상사 식구들은 남원 시청 앞에서 열리는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촛불 집회’에 가신다. ‘지리산을 그대로! 산악열차 백지화!’ 지리산을 지키는 사람들은 삼십년 전에도, 삼십년이 지난 오늘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마음이 무겁다.

첫번째 프로그램 ‘내가 사랑한 꿈 꾸는 나’, 자신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고, 꿈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다 좌절된 경험을 글로 쓴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명상하듯 걷고 또 걷는다. 내 인생의 장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사라진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숨김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들과 함께 참여한 나도 엄마로서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말하게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이것 또한 도법 스님의 마법이다. 스님은 인자한 웃음으로, 때로는 마음 아픈 눈빛으로 그저 말없이 들어주신다.

둘째 날, ‘생명평화 백대 서원 좌선 명상’을 한다. ‘생명평화 백대 서원’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하는 오래된 미래의 길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할 때만 그 존재가 가능하다. 서원은 ‘주체적으로 진리가 삶을 자유롭게 한다’로 시작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말씀이 떠오른다. ‘아, 모든 종교는 그 뿌리가 닿아 있구나!’

아침 울력은 풀 뽑기다. 선재 스님은 풀 뽑는 것 하나도 수행이라고 하신다. 작은 생명인 풀에게 미안한 마음을 건네고, 뿌리에 묻은 흙은 잘 털어서 땅에게 돌려주라고 하신다. 우리는 말없이 풀을 뽑는다.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내 생각의 뿌리가 뽑힌다. 신기하다. 내가 뽑고 있는 것은 분명 풀인데 생각이 가벼워진다.

학교에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가.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넘쳐난다. 팀을 조직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계획한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그것의 본질을 통찰할 틈이 없다. 울력 시작 전과 후 합장 반배, 본질에 닿게 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가 살아갈 자유로운 나’, 도법 스님의 즉문즉답 시간이다.

“인생이란 뭐야? 나는 누구야?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

우리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으며,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생명과 평화를 서원하고 지향하며 정진하는 존재이다. 도법 스님은 말씀하신다.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순간, 천년의 어둠이 그 즉시 즉각 사라진다.”

셋째 날, ‘생명평화 백대 서원 절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둥그렇게 자리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배운 대로 천천히 절을 한다. 절 동작 하나하나에 오롯이 집중하니 서원이 마음에 들어온다. 절을 올리면서 세상이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내가 깨어야 할 꿈은 무엇일까? 내가 꾸어야 할 꿈은 무엇일까?

학교로 돌아와서, 나는 특별한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 주제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은 무엇일까?’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인 자연과 동물과 식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은 그 연결망의 한 부분이라는 겸허한 배움을 현명한 아이들은 잘 챙겼다. 실천 덕목을 찾을 때, “편리함이라는 생각을 버리자”라는 한 친구의 발언에 아이들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얘들아, 나는 그동안 지구의 주인이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했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인간이 주인공이고 동물이나 식물은 그 뭐지, 엑스트라 그거라고 생각했었어.”

“나는 서로 관련 있는 것을 선으로 연결하면서, 거의 모두 연결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 복잡한 거미줄 같아.”

“선생님, 오늘 수업 뭔지 모르게 좋았어요.”

“선생님, 앞으로는 좀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웃음)”

실상사 농장. 강부미 선생 제공

◆ 8월, 농사일 수행

여름 방학, 고대하던 나의 여름휴가는 실상사 농사일 수행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이어폰과 핸드폰을 챙겨서 실상사 둑길을 걷는다. 왼쪽 귀에는 조성진님이 연주하는 비창 2악장을 듣고, 오른쪽 귀는 뱀사골 계곡 물소리를 듣는다. 첫 음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이 이것이구나. 멀리서 다동이 반갑게 달려온다.

둘째 날, 농장 일은 아침 6시에 시작된다. 배추 모종을 심는다. ‘잘 살 수 있겠어? 뿌리내릴 수 있겠어?’ 연약한 줄기를 한 손으로 조심히 감싸고 뿌리가 다치지 않게 온 정성을 들여 주변 흙을 살살 모아서 조심스럽게 눌러준다. 힘없는 배추가 봉긋이 서지 않으면 조금 더 흙을 긁어다 뿌리를 덮어서 세워준다. ‘잘 살아야 한다.’ 당부도 잊지 않는다. 밭이랑 끝이 아득하다.

누군가는 묵묵히 땅을 고르고, 배추 모종을 기르고, 심고, 날씨를 보면서 물을 뿌려주고, 풀을 메고, 태풍 예보에 오며 가며 노심초사…, 우리 학교 아이들은 급식 식판에 음식을 남겨서 버리고 또 버린다. ‘아! 뭔가 잘못되고 있다.’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다시 해보고 싶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꿈틀거린다.

오후에는 고추를 딴다. 잘 익은 고추를 가려내려고 고개를 땅으로 처박는다. 농장지기 짱짱님은 자연스러운 포즈로 신기하게도 잘하신다. 우리 어머님은 한평생 뙤약볕에서 허리를 굽혀 고추를 따셨다. 그것을 하우스에서 말리고, 방앗간에 가서 빻아 곱디고운 고춧가루를 주셨다. 나는 어머님이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들고 와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끝이었다. 삼십년을 그렇게 고춧가루를 받아왔다. 세상에…. ‘아! 한참 잘못 살아왔구나.’

저녁 공양 후 산책길, 예쁜 들판이 나온다. 초록색과 연두색과 황금색이 절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들판이다. 멀리 지리산은 어둑어둑 저녁 채비를 하고, 하늘빛은 더없이 곱다. 오십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 온 세상을 다시 보게 되다니, 실상사가 나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고 있구나!

셋째 날, 휴휴당 마루에서 보는 느티나무와 약사전 불빛이 따뜻하다. 아침 예불 목탁 소리, 지금 나는 어떤 인연으로 여기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아깝다.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참깨밭 비닐을 제거한다. 아침인데도 땀으로 옷이 흥건하다. 스님들, 활동가님들과의 대화는 한마디 한마디가 화두이고 법담이다. 한없이 유쾌하고 가볍다.

점심 공양 후 법인 스님 차담, 흙과 땀이 주는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오후에는 감자밭 풀을 뽑는다. 아직 싹이 나오지 않는 것도 있다. ‘건강하게 올라오너라.’ 싹이 올라온 녀석들에게도 말을 건넨다. ‘애썼다. 잘 자라야 한다.’ 해 질 녘, 황홀한 산책길을 혼자서 늦게까지 걷는다. 사방이 고요하고, 고요하다.

넷째 날, 오늘은 집에 가는 날이다. 아쉽다. 종일 참깨밭에서 비닐과 대화한다. 이틀째 만나서 제법 친해졌다. 비닐을 벗은 밭이랑이 예쁘다. 포대에 담긴 수확한 검은색 비닐도 예쁘다. 몰입이 주는 지고한 행복이다.

농장에서 마지막 차담으로 회향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꽃밭을 뒤로하고 논길을 따라서 운전하고 나온다. 8월, 이곳에서 완벽한 휴가가 이렇게 저문다. 9월, 2학기 첫 수업으로 아이들과 해보고 싶은 ‘생태·환경·기후 수업’을 디자인하면서….

나의 교실. 강부미 선생 제공

◆ 그리고 9월

“얘들아, 선생님은 ‘음식물 쓰레기’라는 이 말이 정말 이상하단다. 음식은 자연과 많은 사람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온 선물인데, 쓰레기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아.”

아이들 눈빛은 제법 숙연하다.

“빈 그릇 운동, 나 혼자 실천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뭐가 좋은 점이 있을까요?”

“환경이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져요.” “뿌듯해요!”

아이들은 알고 있다.

“아! 그렇지, 깨끗하게 다 먹는 순간, 즉각 즉각, 바로 그 즉시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야.” 나는 도법 스님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다.

“괜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이들에게 다시 묻는다.

“자연 앞에 겸손한 사람이요.” “농부, 어부들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요.”

“그렇지, 지구와 이웃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 자연과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이 역시 도법 스님 표현이다.

“보살의 정토가 어디인가? 중생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문득 <유마경>(불교 경전 중 하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변주하고 싶다.

“강부미의 정토는 어디인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이다.”

지리산 산내면 실상사, 그곳에 뭔가를 두고 온 듯, 자꾸만 다시 가게 된다. 깊고 너른 품으로 안아 주는 지리산, 밤안개 번지는 산내마을 저녁 불빛, 나를 배웅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동이 눈빛이 거기 있다. 두고 온 것은 더 많다. 포슬포슬한 흙에서 쑥쑥 자라나는 푸성귀들, 다정한 실상사 농장, 약사전과 느티나무가 보이는 휴휴당 마루, 백련 홍련 가득한 연꽃밭, 꿈에 본 듯한 산책길, 모두 그곳에 그대로 두고 온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도법 스님과 법인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가고, 내가 심은 배추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서 가고, 공동체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가고, 또 아무 일이 없어도 간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수업, 삶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수업을 해주고 싶어서 간다. 자기 인생을 주인공으로 당당히 사는 아이, 친구와 대화하는 즐거움을 알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과 대화할 줄 아는 아이, 자기 삶의 주제를 찾고 탐구하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 자연과 이웃과 자신을 사랑하면서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아이…, 그런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내 수업의 원재료가 실상사 도처에 널려있다.

노을도 산내면의 노을이 아름답기가 으뜸이고, 실상사 나물밥 공양도 어느 유명 레스토랑에 비할 수 없이 맛나다. 해 질 무렵, 지리산 자락에서 실상사 마당으로 내려오는 모색(暮色)이 콘크리트 아파트 숲속 학교에 앉아있는 내 마음에도 내린다. 이제 목탑지 초석까지 어둠이 다가왔겠구나, 이제 석등까지 어두워졌겠구나, 가늠하며 부지런한 하루를 접는다. 지리산과 산내면과 실상사, 이 저녁 모두 평안하기를….

강부미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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