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 '만원버스'에도 흠칫…일상 파고든 집단 트라우마
"밀지 마세요" 외침에 순간 정적
도시철 등 '거리두기' 현상까지
사망 많은 20대 심리적 충격 커
번화가 골목에서 156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한국 사회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매일 반복되는 ‘지옥철’과 ‘만원버스’는 더는 당연하지 않다. 전문가는 밀집된 공간에서 불안과 공포감이 높아지는 집단 트라우마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퇴근길 ‘지옥철’에서 함부로 밀어대는 사람이 줄었다.”
경기 하남시 집과 서울 강남구 직장을 도시철도로 출퇴근하는 하은혜(여·20대) 씨는 이번 주 지하철에서 변화를 느꼈다. 평소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도시철도에서는 밀고 밀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이후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하 씨는 “이태원 참사 이후 출퇴근길, 사람이 많으면 억지로 타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늘었다. 도시철도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붙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건대입구 환승 계단에는 늘 사람이 뒤엉켜 지나갔는데 오늘은 일정 간격 떨어져 차례를 기다리는 듯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통로도 자발적으로 만들어 비워놨다”는 경험이 올라왔다. 또 “지하철에서 누가 계속 밀어서 ‘밀지 마세요’ 외치니, 동시에 주위 사람들이 다 멈추고 순간 조용해졌다”는 경험담을 공유하기도 했다.
부산 대학가에서는 통학길 ‘만원 버스’를 두고 대학 측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오후 1시 20분께 부산대학교 순환버스는 콩나물시루였다. 의자 양옆은 물론 가운데에도 학생들이 몸을 밀착하고 서 있었다. 부산대 재학생 A 씨는 “이태원 참사 기사를 읽으며 그동안 순환버스에서 겪은 아찔했던 상황이 생각났다. 더는 이대로 타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동아대도 비슷했다. 동아대 재학생 김모(27) 씨는 “30분에 1대 오는 통학버스 정원은 40명이지만 60명가량 탈 때도 많다. 손잡이가 없어 다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는 지옥철과 만원버스를 둘러싼 인식 변화는 이태원 압사 참사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 현상이라고 봤다. 트라우마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생각을 바꿀 만큼 강력하다. 특히 전쟁·자연재난·대형참사 등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심각한 일을 겪을 때 집단으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입는다.
창원한마음병원 정영인(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태원 참사 이후 밀집된 공간에서 불안과 공포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집단적으로 나올 수 있다.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 현상이다”며 “특히, ‘21세기의 마약’인 SNS로 참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태원 참사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온 20대에서는 정신적 괴로움을 호소한다. 중·고등학생 때 세월호 참사를 겪고 성인이 된 뒤 이태원 참사를 접한 20대에게 또래 집단의 죽음은 반복된 일상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변아현(여·27) 씨는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뉴스를 보며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참사도 뉴스를 계속 봐서 다 아는 내용인데도 눈을 못 돌리겠다”며 “SNS에도 친구들의 평범한 일상과 이태원 참사 게시물이 뒤섞여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20대의 우울·불안 지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2017년 대비 2021년 20대 환자 수는 우울증은 127.1%(연평균 22.8%), 불안장애는 86.8%(연평균 16.9%)로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많이 증가했다. 동래구 사직동의 한 약사는 “최근 20대가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게 늘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태원 압사 참사 이후 트라우마 상담 급증으로 국민 심리 안정을 위해 ‘마음안심버스’를 전국 확대 운영한다. 버스는 현재 서울 시내 분향소 2곳에서 5대 운영해 유가족과 목격자, 부상자 및 일반 시민의 심리 지원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전국 전체 45대 있는 버스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국가트라우마센터는 마음 건강을 지키기 위해 주변인과 서로 대화하며 감정을 털어놓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충분한 대화도 중요하지만, 눈물이 날 때는 정상적인 반응이므로 억제하지 말고 울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리적 도움이 필요한 국민은 위기상담전화(1577-0199)를 통해서도 도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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