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묻는 것이 애도다, 분노가 애도다
황준범 | 정치부장
지난 1일 공개된 이태원 참사 당일 112 신고 11건의 녹취록은 가슴을 치고 또 치게 만든다. “압사당할 거 같아요. 통제 좀 해주셔야 될 거 같아요.”, “지금 대형 사고 나기 일보직전이에요”, “진짜 사람 죽을 것 같아요”…. 156명의 사람이 사람들에게 짓눌려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하기 3시간40여분 전부터 시민들은 “어떻게든 해달라”며 애타게 국가를 찾았다. 경찰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하게 인력을 투입해 동선을 관리하고 인파를 통제했다면, 이번 사고는 없었다.
사전에 막을 수 있던 ‘인재’였다는 점이 112 신고 녹취록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그동안 ‘추모에 집중하자’며 정부에 보호막을 치던 여당도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루 만에 화들짝 돌아섰다.
2014년 봄, 우리는 진도 팽목항에서 25㎞ 떨어진 맹골수도 망망대해에서 어린 학생들과 교사 등 304명이 스러지는 상황을 발을 동동 구르며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온 나라가 성찰했지만 8년 뒤 또 참극이 벌어졌다. 핼러윈을 앞두고 10만명이 모일 거라고 지자체와 경찰은 예측하고도 그에 걸맞은 방비는 하지 않았다.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소방 인력이 1분이면 달려갈 수 있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고 날 것 같다’는 시민들의 외침이 몇시간 전부터 있었는데도 당국은 손을 쓰지 않았다.
사고 발생 뒤 몇분 만에 구조대가 이태원에 닿았어도 인파로 인해 현장 접근에 애를 먹으며, 계속해서 골든타임을 놓쳤다. 경찰 출신인 권은희 의원은 “112 신고 받고 경찰관들 보내서 무전기 들고 ‘우측통행’만 외치게 했어도 막을 수 있던 사고”라고 했다.
참사 직후 정부는 무얼 했나. 주무 장관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선부터 그었다. 이 장관을 비롯해 오세훈 서울시장, 윤희근 경찰청장 누구 하나 나서서 ‘내 책임’이라며 사과하는 이 없다가, 충격적인 112 신고 녹취록이 공개된 날에야 일제히 국민 앞에 고개 숙였다. 참사 사흘 만의 떠밀린 사과는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선 경찰관은 “그저 위만 바라보다가 사고가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 그리고 광화문 시위대로부터의 용산 대통령실 보호에 경찰 수뇌부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핼러윈 인파 대응은 시민 생명·안전 문제인데도 우선순위가 못 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들은 왜 그토록 사과를 주저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참사 직후 먼저 무겁게 국민에게 사과하고 지휘에 나섰다면 장관, 서울시장,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등이 그렇게 대처했을까? 윤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마음이 무겁다”고 하고, 유가족들을 만나 “국가가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죄송하다”고 했지만 공식적인 대국민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김영삼(성수대교 붕괴 등), 김대중(화성 씨랜드 화재), 이명박(천안함 사건) 등 역대 대통령이 대형 인명사고 때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직접적인 잘못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받아들이며 국민 마음을 보듬기 위함이다. 윤 대통령이 수해 때보다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어도 “사과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정부는 오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정치권이나 언론도 정쟁이나 자극적 보도를 자제하며 추모 분위기를 유지해왔다. 정부가 강권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에 몸서리치며 아파하고 있다. ‘누구라도 있을 수 있던 그날 그곳에 내가 없었던 것일 뿐’이라며 미안해하고 있다. 정부는 진정성 있는 사과도 없이 국가적인 애도기간을 설정하고, 여당은 책임 소재를 따지는 행위에 은연중 침묵과 절제를 요구했다. 이제 슬픔이 분노로 바뀌고 있다. 정부·여당이 자초한 일이다. 악몽 같은 참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는 분노를 삼키지 말고, 원인을 따지고 책임을 계속 물어야 한다.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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