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권력의 보복·탄압 악순환…‘김대중 정신’ 되새기며 성찰할 때
[왜냐면] 이상식 | 전 부산지방경찰청장
156명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이 국가적 대참사 앞에 여야는 사고수습과 대책 마련을 위해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협치가 평상시에도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왜냐하면 이태원 참사가 있기 전까지 정국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폭풍전야였기 때문이다.
국가적 애도 분위기 속에 검찰 수사는 숨 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측근인 이화영·김용을 구속시키고 정진상도 출국 금지시킨 상황에서, 이재명 대표를 향한 윤석열 정부의 사정 드라이브가 오래 멈추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수사도 서욱, 김홍희 구속에 이어 박지원과 서훈 다음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할 태세다.
늘 그랬듯이 겉으로는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정치보복과 야당탄압이라는 본질을 숨긴 채 30%를 밑도는 국정 지지도를 반전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의의 실현과 법의 지배라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과유불급인 법이다. 또 목적과 수단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수긍한다. 그러나 지금의 검찰 수사는 균형감을 상실했으며 공정하지도 않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고통받는 서민들이 보기에 누가 체포되고 구속됐다는 뉴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나라 안팎 사정이 얼마나 엄중한가. 여야가 머리를 맞대도 부족한 상황에서 쌍방 간 극한 대립은 결국 국민에게 피해가 돼 돌아올 것이란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보복과 야당탄압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재인 정부도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적폐 청산이라는 대의는 있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많은 인사가 검찰수사를 받고 수감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9년 1월 더불어민주당 지역위원장이던 나는 대구지역 언론에 ‘적폐 청산 너무 오래 한다’는 제하의 기고를 했다. 적폐 청산의 기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민이 피로해 하니 이제 민생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기고로 강성 민주당원들의 항의에 시달렸지만 해야 할 말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이렇듯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히 보수와 진보 진영 간 권력이 교체될 때마다 탄압과 보복이 되풀이되고 사생결단의 대립과 투쟁 속에 날을 지새우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포용과 통합의 정신을 생각해 봐야 한다.
김대중이 누구인가. 지금 정치를 하는 우리로서는 독재 정권 치하에서 그가 겪은 고통과 시련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투옥, 망명, 납치, 사형선고, 가택연금 등 그야말로 탄압과 박해로 점철된 가시밭길 정치역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1988년 6월 평민당 국회 대표연설에서 ‘어떠한 정치보복도 확고히 반대할 것입니다. 반성과 사과를 촉구할 뿐 형사처벌을 막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뒤 평소의 소신대로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았다.
그인들 왜 권력을 행사하고픈 유혹이 없었을까. 자서전에서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납치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파헤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적어도 권력이 개입된 사건을 또 다른 권력으로 파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고 썼다. 그의 숭고한 정신에 비하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책과 판단의 영역조차 법으로 재단하려는 요즘 위정자들은 왜소해 보일 따름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반대편에 서 있었던 김종필 이한동 박태준을 차례로 총리로 기용했다. 또 노태우 정권 정무수석을 지낸 김중권을 초대 비서실장으로 발탁하는 등 사실상의 통합정부를 실현하였다. 국가부도 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국민통합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나라와 국민 전체를 보며 통치권을 행사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포용과 통합은 번영의 가장 굳건한 토대다. 동서고금 수많은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진영을 뛰어넘어 포용과 통합을 실천하고자 했던 김대중 정신을 오늘날 다시금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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