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弗 영구채 조기상환 불발…이번엔 흥국생명發 '외화채 위기'
채권시장에 또다른 악재
영구채는 '사실상 5년 만기채권'
조기상환 안하면 평판리스크 커
흥국 "年 8%에도 차환발행 못해
6개월이나 1년 뒤 꼭 조기상환"
영구채 콜옵션 이행 못한 건
13년前 우리銀 후순위채 후 처음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영구채)의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폭풍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기업 발행 외화채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로 국내 채권시장이 얼어붙은 데 이어 외화채 발행까지 위축되면 기업들이 유동성을 확보할 통로가 완전히 막힐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차환 발행 못 해 조기상환 포기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오는 9일로 예정된 5억달러 규모의 외화 영구채 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지난 1일 공시했다. 국내 기업이 발행한 자본성증권(영구채·후순위채)이 조기상환되지 않는 것은 2009년 우리은행 외화 후순위채 이후 처음이다.
흥국생명은 올 9월 이사회를 열고 외화 영구채 발행을 추진했다. 2017년 11월 발행한 5억달러 규모 영구채 차환을 위해서였다. 통상 자본성증권은 약 5년 뒤에 발행사가 채권을 되사주기로 하는 조기상환 조건이 붙는다. 5억달러 가운데 3억달러는 외화 영구채로, 1000억원은 국내에서 후순위채로 조달하겠다는 게 흥국생명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금리인상 등의 여파로 새 외화 영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조기상환도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차환 발행 없이 기존 영구채를 조기상환하면 재무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 비율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지난 2분기 기준 흥국생명의 RBC 비율은 금융당국 권고치(150%)를 소폭 웃도는 157.9%(2분기 기준)다.
흥국생명이 조기상환을 포기하면서 해당 영구채 금리는 2017년 발행 당시인 연 4.475%에서 연 6.7%대까지 오를 전망이다. 조기상환을 하지 않으면 가산금리가 적용되는 ‘스텝업(step up)’ 조항 때문이다.
흥국생명은 이른 시일 내에 투자자들을 만나 상환 의지 등을 전달할 방침이다. 흥국생명 고위 관계자는 “연 8%대까지 금리를 높였지만 외화 영구채를 사들이려는 투자자가 아예 없었다”며 “이번 영구채가 6개월마다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만큼 6개월 혹은 1년 뒤에 반드시 조기상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 외화 조달 ‘비상’
흥국생명의 조기상환 미시행 결정으로 외화채 시장이 빠르게 얼어붙을 전망이다. 조기상환은 투자자 신뢰와 직결된 요소다. 투자자들은 발행사가 조기상환권을 행사할 것이란 전제 아래 영구채를 매수한다. 영구채가 ‘사실상 5년 만기 채권’으로 인식되는 배경이다. 발행사가 영구채를 조기상환하지 않으면 재무상태가 어렵다는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다. 투자자들이 채권을 던지면서 흥국생명의 영구 외화채 가격도 출렁이고 있다. 99달러 선에서 거래되던 영구채는 이날 한때 82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로 국내 기업이 발행한 외화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외화 조달을 준비 중인 기업들은 줄줄이 비상이 걸렸다. 한국투자증권은 외화채 발행 일정 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은 캥거루본드(호주달러 표시 채권) 발행을 추진 중이지만 투자자 모집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한화생명과 KDB생명은 2018년 발행한 외화 자본성증권 조기상환 만기가 내년 상반기 도래한다. 발행 규모만 각각 10억달러, 2억달러에 달한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흥국생명의 영구채 조기상환 미실시로 한국물에 대한 투자 심리는 당분간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회사채 시장까지 여파가 번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공공기관·금융기관의 해외 채권 발행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한전채·산업은행채 등 우량 채권이 국내 회사채 투자 수요를 대거 흡수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해외 채권 발행도 어려워지면 국내 시장에서 채권을 찍을 수밖에 없다.
시장의 우려가 커지자 금융당국은 사태 진화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흥국생명의 경영 실적이 양호한 데다 보험금 지급 등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며 “기관투자가들과 지속 소통하는 등 시장 상황을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주/서형교 기자 blackse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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