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물 매도 주문만 쌓여"… 온기 돌던 채권시장 다시 꽁꽁

차창희, 김명환, 문재용 2022. 11. 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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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 콜옵션 불발 후폭풍 … 대외신인도 타격 우려
채권 차환발행 어려워지자
흥국생명 5억弗 조기상환 못해
내년 만기 韓기업 외화채권
올해보다 22% 늘어난 250억弗
발행금리 갈수록 높아져
달러 자금조달 가시밭길

"레고랜드 사태 이후 원화채권뿐 아니라 한국 기업 발행 외화채권(한국물·코리안 페이퍼)도 '팔자' 주문이 쌓여왔습니다. 여기에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조기상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리며 국내외 투자자를 가리지 않고 한국물에 대한 '사자' 주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홍콩 소재 외화채권시장 관계자)

흥국생명보험이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국내 기업·금융사의 외화채권 조달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 기업이 발행하는 외화채권(한국물)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 신뢰도가 떨어지며 채권 발행 때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금리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흥국생명 자본건전성을 고려한 조치였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기준금리 급등 기조가 지속되면서 신규 발행금리가 상승한 게 이번 리스크 발생 원인으로 지목된다. 보통 금리가 인하될 땐 신규 채권 발행을 통해 차환이 자연스레 이뤄지지만 고금리 시기엔 신규 발행 채권의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나 기업에는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최근 금리 수준이 너무 올라 신규 발행을 통해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갈아타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발행사 입장에선 시장 충격에 따른 인지도 하락과 평판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조기상환 미실시로 인해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쿠폰(이자)도 기존 4.475%에서 6.74%로 상승(스텝업)했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첫 번째 콜 시행일을 실질적 만기로 인식했던 투자자들의 신뢰가 낮아질 수 있다"며 "2009년 이후 지금까지 국내 금융기관들은 모두 콜 시행일에 조기상환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채권 가격 하락과 향후 투자 수요 위축이 전망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흥국생명 관계자는 "영구채 차환 발행 없이 자체 자금으로 상환했을 때 손해가 너무 커 투자자들에게 추가 금리를 제공하고 시장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콜옵션 행사를 연기한 것"이라며 "유럽 금융권에서도 지난달 비슷한 이유로 콜옵션 행사를 연기한 사례가 있으며 자본건전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흥국생명의 올 2분기 말 기준 지급여력(RBC) 비율은 정부 권고치를 웃도는 158%다.

이번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로 인해 투자자들은 당분간 투자금이 묶이게 됐다.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미실시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콜옵션을 행사하는 게 관행적으로 여겨져 왔다. 이 때문에 앞서 정부가 내놓은 '50조원+알파(α)' 규모의 시장 안정화 대책으로 단기자금시장에 온기가 스며드는 상황에서 또다시 시장 심리가 불안정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2009년 우리은행 콜옵션 미행사 당시 한국물 채권 값이 떨어지는 전례가 있었다.

증권업계에선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국내 금융사 발행 신종자본증권은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흥국생명 이후에도 줄줄이 롯데손해보험 후순위채 등도 조기상환 기한이 도래해 이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 IB업계의 설명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금융지주와 은행들의 신종자본증권 누적 발행액은 7조3000억원으로 최대 발행 규모로 기록됐던 2020년 5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자본 확충을 위해 거의 매달 금융사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소식이 들릴 정도였다.

문제는 한국물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외화표시채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는 홍콩 등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물 투자에 대한 투자를 꺼리면서 당분간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블룸버그와 NH투자증권에 따르면 2023년 예정된 외화표시채권 만기액은 올해보다 22% 늘어난 250억달러(약 35조원)에 달한다. 다만 글로벌 기준금리 급등 기조로 인해 미국, 유럽 등 해외 시장에서도 스텝업을 단행하는 경우가 많아 우려할 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당국도 해당 사안을 인지하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계약상으로는 스텝업을 하는 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므로 채무불이행이라고 보진 않는다"면서도 "해외 투자자 반응도 살피는 등 주시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금융당국 관계자는 "흥국생명이 영구채 조기상환에 나설 경우 각종 건전성 비율이 악화돼 타격이 더 클 것으로 봤다"며 "국내 금융사들의 외화채권 발행 계획도 연내 2~3곳에 그쳐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금융당국은 원화 자금 조달 시장이 불안정해지며 국내 기업·금융사들의 외화채권 발행을 독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흥국생명 사태 이후 한국물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급감해 이 같은 자금 시장 해법 역시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차창희 기자 / 김명환 기자 / 문재용 기자]

용어

신종자본증권 : 주식과 채권 성격을 동시에 지닌 하이브리드 증권으로 보통 영구채라고 불린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계산할 때 기본자본으로 잡혀 은행들의 자기자본 확충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후순위채권으로 금리가 높은 편이며 통상 5년, 10년 만기물로 중도상환(콜옵션)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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