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살아남은 자’의 책무

정민정 논설위원 2022. 11. 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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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정 논설위원
채 피우지도 못하고 스러진 생명들
이제 매 가을마다 슬픔 무게 견뎌야
추모마저 정쟁으로 퇴색되지 않도록
진정한 애도 위해 책임 분명히 해야
정민정 논설위원
[서울경제]

핼러윈의 비극,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악몽 같은 그날 이후 벌써 닷새가 지났다. 맑은 공기를 들이쉬는 일상의 몸짓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살아남은 자들은 무겁고 비통한 시간을 버티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이 생을 채 피우지 못한 20대 청년이고 심지어 중고생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은 더욱 가슴을 후벼 판다.

돌이켜보면 8년 전 봄도 그랬다.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됐다. 당시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희생자 대부분을 차지했던 단원고 학생들이 97년생, 꽃 같은 열일곱 살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유채꽃 만발한 제주의 찬란한 봄을 맞닥뜨릴 때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에 흠칫 놀라며 자책해야 했고 충분히 누리지 않음으로 부채 의식을 덜고자 했다.

이제 가을을 지날 때도 같은 무게의 슬픔을 견뎌내야 한다. ‘트릭 오어 트리트(trick or treat)’를 외치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상천외한 코스튬을 한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날, 그때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을 칠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옥죌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이 1차적인 트라우마 피해자이지만 현장에 있던 부상자와 목격자, 구조 인력 등을 포함하면 최대 1만 명까지 트라우마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사고 당시 영상과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여과 없이 공유되면서 고인과 유족, 생존자에 대한 2~3차 피해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가학적인 고통을 안기고 있다.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하고 있다./이호재기자. 2022.11.02

그런 면에서 2001년 9·11테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미국인들이 어떻게 슬픔의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복기하는 것은 의미 있다. 9·11테러메모리얼&뮤지엄에 들어서면 2만 3000여 점의 사진과 1만여 점의 유물, 희생자 2983명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벽에는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단 하루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쪽 구석에는 티슈들이 놓여 있다. 마음껏 그리워하고 충분히 슬퍼하라는 의미다.

한 사회가 갑작스럽게 많은 생명을 잃는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 희생자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들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며 공동체의 힘으로 보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세월호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정쟁화하며 아이들의 비극적인 죽음마저 정치의 굿판에 소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만큼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짧지만 의미 있는 삶 하나하나를 오롯이 새기는 추모의 공간에 자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재난 매뉴얼 등 사회 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3년 만의 노 마스크 핼러윈 축제를 맞아 인파 10만 명이 몰려들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는데도 적극적인 안전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분명히 짚어야 할 문제다. 당일 사고 발생 약 네 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신고가 쇄도했지만 경찰의 대응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사고 직전인 오후 10시 11분 녹취록에는 신고자의 비명까지 담겼다고 하니 할 말을 잃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재난 안전 총괄 부처인 행정안전부 장관과 시민의 안전을 책임진 경찰청장 등 공직자들은 면피성 발언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 땅에 같은 비극이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것만이 속죄하는 길이다.

9·11 테러로 붕괴되기 직전 세계무역센터에 남아 있던 이들이 가족과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사랑해”였다고 한다. 이태원 그 비극의 현장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우리 아들딸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말 역시 “사랑해”였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들을 올곧게 지켜내는 것은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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