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돈 가뭄 길어지는데…시장 짓누르는 산은채
자금조달 위해 채권발행 늘려
시장 "시중 자금 빨아들여
한전채 감소 효과 줄어들듯"
정부 "예정물량 취소 어려워"
채권 시장의 안정을 위한 대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KDB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 발행이 늘고 있어 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레고랜드발 자금 시장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구원 투수로 등판한 산업은행이 산금채를 찍어 낸다면 또다시 회사채가 팔리지 않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어서다. 다만 일각에서는 산금채 발행 물량이 급격히 늘지만 않는다면 충격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일 금융권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긴급 시장 안정 조치'에 따라 산업은행이 지난달 27일부터 10조원 규모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중 우선 2조원을 증권사 CP 매입에 투자하고 있다. 기업 지원에 나선 산업은행은 산금채 발행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정책금융기관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사실상 산금채 외에는 거의 없다는 논리다. 개인예금 비중이 시중은행에 비해 매우 낮은 상황이라는 특수성도 있다. 또 기존 발행 물량의 만기가 돌아오면 차환을 해야 하고, 정부가 유동성 공급 확대 차원에서 산업은행에 요구한 CP 매입 프로그램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도 산금채를 통한 자금 확보가 필요하다. 시장에선 "한전채 물량이 줄어들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는데, 산금채가 대거 쏟아진다면 시장의 자금은 다시 마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 대책으로 완화될 기미를 보이던 시장이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산업은행 관계자는 "산업은행은 조달 구조에서 산금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70~80% 수준인데 신규 발행 없이는 정책자금 공급이 불가한 구조"라며 발행 물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입장도 난감하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산금채 스케줄을 지금 와서 취소할 수 없다"며 "시장이 인지하지 못한 산금채 발행은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금 시장 경색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인 특수채의 구축 효과는 이미 10월에 뚜렷하게 나타난 바 있다. 특수채는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법인이 발행하는 채권으로 금융 특수채(산금채 등 특수은행채), 비금융 특수채(한전채 등 공사채)로 이뤄져 있다. 지난달 이들 특수채의 범람으로 회사채 순발행액은 역성장(마이너스)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회사채 발행액은 3조6921억원이었으며, 상환액은 8조5300억원이었다.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은 -4조8379억원으로 집계됐다. 채권 발행액보다 상환한 금액이 많았거나, 설령 발행했다고 해도 목표했던 수요예측 모집 금액을 채우지 못하고 미매각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5월과 7월에도 회사채 순발행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각각 -6111억원, -1조132억원 수준이었다. 지난달 규모는 7월의 4배 이상이다. 발행액 규모 자체로만 봐도 6월에는 7조원대였다가 8월에 5조원대로 떨어지더니 지난달에는 3조원대로 내려앉았다.
반면 특수채 발행은 증가했다. 지난달 특수채 발행액은 6조2106억원이었고, 상환액은 4조1381억원이었다. 순발행액은 2조725억원이었다. 특수채의 발행은 6월 이후 6조~7조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에 공채와 사채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신용도가 높은 특수채가 쏟아져서 회사채를 구축한 셈이다. 은행채도 순발행액이 2600억원으로 발행액이 상환액보다 컸다. 강원도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로 단기 자금 시장이 얼어붙은 것도 이 같은 현상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된다. 이달에도 한전채에 이어 산금채까지 시장에 꾸준히 나온다면 상황을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는 평도 나온다.
신용 스프레드(국고채와 회사채 'AA-' 3년물 금리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는 점도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을 갖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날 오전 기준 신용 스프레드는 1.439%포인트로 전날 종가보다 소폭 상승했다. 신용 스프레드는 지난달 23일 긴급 시장 안정 조치 이후에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한전채 물량이 지속적으로 시장에 풀리는 부분도 크레디트 시장에 교란을 일으켰다"며 "단기물 시장에서도 A1 등급 상품들에 대해 이미 높은 금리의 시장가격이 형성돼 있다 보니 더 저조한 등급의 크레디트물에 대한 투심이 회복되지 않아 스프레드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은 지금의 신용 스프레드 수준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금융위 관계자는 "채권시장안정펀드의 투입과 한국은행의 국고채 매입 등 정책 조치가 시장에 작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명환 기자 / 채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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