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 앤 캐치] 누가 펠로시를 ‘악마’로 만들었나
트럼프 등장 5년, 정치 폭력 10배 증가
위협받는 민주주의, 상황 갈수록 악화
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한 2022년 미국이 다시 공개됐다. 지난달 28일 새벽 낸시 펠로시 미국 연방하원 의장의 샌프란시스코 자택에 괴한이 침입했다. 괴한은 남편 폴 펠로시(82)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다. 망치로 공격을 가하기 전 그는 “낸시는 어디에 있나? 낸시는 어딨어?”라고 외쳤다. 이 말은 ‘국민의 적’같이 극우 음모론자들이 구호처럼 쓰는 표현이다. 펠로시 의장은 워싱턴에 체류해 위기를 모면했지만 남편 폴은 두개골이 골절되는 피해를 입었다.
용의자인 데이비드 드파페(42)는 반유대주의, 큐어논(미국의 극우파 음모론의 하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추종자 등 극우세력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거짓말하는 민주당 우두머리’로 칭한 펠로시 의장을 납치해 심문할 계획이었다. 드파페는 “거짓말을 하면 무릎을 부숴 버리려 했다”고 수사기관에 털어놨다. 현재로선 그가 선거부정 등 음모론에 집착했다는 주변 말이 틀리지 않은 셈이다.
정적으로 삼은 정치인에 대한 공격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공격이다. 그러나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 정치가 새로운 건 아니다. 투표소에 무장한 경비가 서 있고, 의원들조차 총기를 휴대하려 하며 폭력을 선동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미국의 정치 풍경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은 미국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이런 말조차 식상한 위로로 들리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펠로시 의장 자택 침입 역시 수많은 정치폭력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서열 3위 펠로시 의장을 겨냥한 이번 공격은 여러 면에서 상징적이다.
이번 사건의 특징은 백인에 의한 백인 폭력이 일반화하고, 온라인을 통해 공유된 음모론과 허위정보들이 정치폭력을 야기한 점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공화당과 그 대변자들이 증오와 음모론을 퍼뜨려 왔다”며 “이번 폭력은 그 결과”라고 지적했다. 극우세력들이 물러서지 않고 용의자 드파페와 남편 폴이 연인 사이라거나, 펠로시 의장 집에서 미친 짓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음모론으로 맞서는 건 또 다른 양상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 정치에 극단적인 폭력과 위협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매튜 댈렉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미국 정치가 거리에 자리를 내주었다며, 그 원인으로 위기에 대한 종말론적 사고, 백인우월주의, 각종 음모론을 지목했다. 상황이 절박한 것은 의원과 가족에 대한 공격이 늘 일어나고, 폭력과 편견의 사도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국면으로 접어드는 데 있다. 그는 심지어 “미국 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치폭력은 일찍부터 가장 시급한 미국의 내부 위협이긴 했다. 더해진 심각성을 알려면 펠로시 의장이 극우세력의 표적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펠로시 의장은 가장 선명하고 확고한 반트럼프, 반공화당 정치인이다.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국정연설 때 연설문을 찢어버리는 강단을 보여줬고, 작년 1·6 의회난입 사태 때는 일주일 만에 트럼프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에서 부결되긴 했으나 트럼프는 임기 중 두 번이나 펠로시 의장에 의해 하원에서 탄핵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트럼프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정치인이 펠로시 의장인 셈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펠로시 의장을 정적으로 삼는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다. 그는 공화당 의원이 총기 반입을 시도하자 의사당에 금속탐지기를 설치하는 등 공화당 의원들과 수시로 각을 세웠다. 공화당 의원이 SNS에서 펠로시 사형집행을 옹호하며 반감을 드러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건재한 펠로시 의장을 공격하는 게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믿는 극우세력에 용의자 드파페도 동조한 것일 수 있다.
펠로시 의장이 우파 공격대상이 되는 과정은 극우의 폭력화가 트럼프에서 기인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트럼프가 선거부정 등 극단주의와 음모론을 주장하면, SNS와 당파성 강한 언론이 이를 퍼뜨리고, 백인 유권자들이 정치폭력에 동원되는 구조다. 트럼프가 선동적 발언, 음모론으로 지지세력을 자극하고 폭력을 유도한 책임은 수치로도 알 수 있다. 의회경찰 집계를 보면, 그의 취임 첫해인 2017년 의원들과 관련한 정치폭력은 4,000건에 육박했는데 이는 전년 902건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한 수치였다. 하지만 그의 임기가 끝난 2020년 정치폭력은 다시 2배인 8,000건을 넘어섰고 작년에는 9,600건에 육박했다.
사실 4차례 대통령 암살이 보여주듯 미국은 정치폭력의 나라였다. 암살되기 2년 전 존 F 케네디는 극단주의의 불협화음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극좌, 극우에 경고했으나 자신이 그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19세기 말에도 분노한 소수파가 무력을 이용해 다수파를 공격했고, 냉전시기엔 공산세력이 미국을 장악하고 있다는 조셉 매카시, 존 버치 협회의 주장에 온 사회가 끌려다녔다. 정치폭력이 난무하던 1969년 1월부터 16개월 동안 폭탄테러가 5,000건 이상, 폭탄위협이 3만7,000건에 달했다고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전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들은 극단주의 세력과 손을 잡지 않았다. 공화당을 우경화로 이끈 배리 골드워터조차 얼 워렌 대법원장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화당 조직과 비공식 관계인 백인 민병대의 부상에서 알 수 있듯이 뚜렷한 구분이 사라졌다. 트럼프가 MAGA 집회에서 언론과 정적에 대한 폭력을 선동할 때 공화당 인사들은 그 옆에 묵묵히 서 지지했다. 심지어 공화당 폴 고사 하원의원은 민주당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을 흉기로 찌르고 조 바이든 대통령을 위협하는 애니메이션을 트위터에 올렸다. 같은 당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은 9·11 음모론을 신봉하고 동료 의원에게 이슬람 지하드(성전) 단원이란 주장까지 했다. 과거 같은 정치인과 극우세력, 음모론자 등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무력을 동원한 힘의 대결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폭력과 위협은 민주·공화 양당을 가리지 않는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지지자인 한 좌파 남성은 2017년 야구연습 중이던 공화당 의원 5명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 스티브 스칼리스 하원 원내총무에게 중상을 입혔다. 낙태 허용 판례가 뒤집힐 우려가 커지던 지난 6월 한 남성은 보수성향의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집 밖에서 흉기를 소지하고 있다 체포됐다.
정치적 폭력의 경향성은 우파에서 더 강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 7월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된 개리 라프리 메릴랜드대 교수 등의 정치폭력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정치폭력은 정치적 신념을 대신해 자행되고 있다. 극우세력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 수준에 차이가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세계적으로 이슬람 극단주의가 더 폭력적인 점에 비춰볼 때 극우세력의 폭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좌파세력의 경우 개인의 급진적인 행동이 폭력적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정치폭력을 신속히 규탄하는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이 심각성을 최소화하거나 외면하는 차이도 발견됐다.
실제 공화당 정치인을 겨냥해 강경 발언을 한 정치인에겐 이후 협박 음성 메일이 쏟아진다. 여성혐오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 등이 자택에 침입해 강도 짓과 기물파손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 됐다. 여성의원들의 경우 성폭력 위협, 살인, 가짜뉴스, 인종차별 등 공격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를 비판하는 것은 위협을 자초하는 일인데 한 민주당 의원은 부인과 아들이 처형될 것이란 협박편지를 받았고, 실제 그의 집 근처에서 총을 든 남성이 체포됐다.
미 연방의회는 의사당 경비 강화에 19억 달러를 책정한 데 이어 의원 자택안전을 위해 1인당 1만 달러의 안전 경비를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데비 딩겔 하원의원은 “의회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지방교육위원회는 방탄복을 입고 회의를 진행하는 실정이다”고 했다. 지난해 자택침입 공격을 받은 그는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는 두려움을 미 언론에 숨기지 않았다. 민주당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도 “상원이나 하원 의원이 살해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정적을 허위주장으로 악마화시켜 지지자들의 행동을 부추기는 정치적 폭력은 선거를 앞두고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8일 미국 중간선거 전후로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태규 논설위원 tgle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태원파출소 직원 "지원 요청했지만 윗선이 거부"... 현장 경찰 '반발' 확산
- "제발 도와주세요" 이태원 참사 당시 울부짖던 경찰관
- '죗값 치르게 하겠습니다'... 이태원역에 붙은 추모 메시지
- 눈 퉁퉁 부은 손흥민 사진 공개, 부상 정도는
- [단독] '죽음의 골목' 도로 못 넓히고 10년 방치한 서울시·용산구, 왜?
- 4시간 전부터 다급한 '압사' 신고만 6건...'경찰'은 없었다
- 최성국 "김광규, 내 결혼 소식에 충격…열흘간 말 못해" ('옥문아')
- [단독] 참사 당일 불법주차 가득한데…안 보인 경찰과 용산구청
- 미 힙합그룹 미고스 멤버 테이크오프 총격으로 사망
- 북한 박정천 "한미, 무력사용 기도 시 끔찍한 대가 치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