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 파랑 다툰 자리서 피어난 보라색 우주
내년 1월까지 마곡동 스페이스K
백지에서 색이 싸운다. 파랑과 빨강을 섞은 뒤 나타나는 보라, 그리고 희고 검은 안료가 캔버스 위에서 수십 마리 뱀이 동시에 똬리를 틀듯 뒤엉킨다.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색들의 쟁투. 합의의 책임은 작가 몫이다. 멀리 서면 우주의 구상성단 같고, 가까이 다가가면 눈발 날리는 산맥 같은 캔버스에는 그렇게 우주 삼라만상의 드라마가 덧입혀진다.
제여란 개인전 '로드 투 퍼플(Road to Purple)'이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개막했다. '색들의 우주'를 창조한 제여란 회화 50점을 미리 살펴봤다.
표제색(色)인 '보라'의 함의부터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먼저 보라는 자연에서 발견하기 힘든 색이다. 가시광선 영역에서 보이는 색상 중 가장 파장이 짧아 끄트머리에 있는 색. 그래서 보라는 무지개 위에서도 맨 끝을 점한다. 인간의 시각이 가 닿을 수 있는 최극단의 색이자 '저 너머'로의 초월에 근접한 색이 바로 보라다.
제여란의 초기 회화에서 누볐던 최초의 색인 검음에 점차 색이 부여돼 20여 년 만에 보라에 가 닿은 건 우연만은 아니게 된다.
제여란의 보라는 작가가 빨강과 파랑을 직접 섞은 보라다. 그는 두 색을 섞어 '다투게' 한 뒤 흑백의 염료를 쏟아붓고 고무가 달린 판화도구(스퀴지)를 휘둘러 우주의 색을 만들어 나갔다. 150㎝를 조금 넘는 작은 키, 그의 스퀴지는 스페이스K에 보관된 것이 80㎝쯤 된다. 작은 손에 스퀴지를 꽉 쥐고 덜 마른 물감 위에 '풀스윙'을 한 자리마다 시간과 운동이 축적됐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제여란의 보라 톤 추상 대작은 작가의 색 실험이다. 전후 독일 회화 거장 리히터가 스퀴지로 직선 운동을 강조했다면 제여란은 곡선 운동에 집중하는데, 이는 몸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운동 중 가장 멀리 가는 것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임을 그가 잘 알기 때문"이라고 힘줘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제여란 회화 중 대다수는 'Usquam Nusquam'을 제목 삼는다.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란 뜻의 라틴어다. 이번 회화도 어디쯤 있을 법하나 또 어디에도 없을 듯한 양가적 풍광을 만들어낸다. 추상화가 대개 그렇듯, 작품에서 구체(具體)를 발견하려 하면 곤란하다. 본인의 스키마(schema·개인 본인의 경험치가 쌓여 만들어진 인지적 틀)로 작품을 해석하면 그 모든 상상의 결과가 정답이다.
다만 한 가지 원칙. 작품은 '반드시' 직접, 가까이서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작가의 스퀴지가 방금 두꺼운 안료 위를 훑고 지나간 듯 박제된 캔버스의 거친 표면이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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