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리멤버' 노인 얼굴을 한 이성민, 베테랑 배우의 도전
노인의 얼굴을 한 배우 이성민은 낯설지 않다. 구부정한 자세, 짙은 목소리, 허공을 보는 듯한 눈빛까지 80대 노인의 모습이다. 노인 연기를 하다 목 디스크까지 왔다는 이성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도전을 완수했다.
'리멤버'(감독 이일형)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80대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이성민)가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 평생을 준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다. 이성민이 연기한 필주는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이행하기 위해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인규(남주혁)에게 운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인규가 CCTV에 노출되면서 위험한 동행이 시작된다.
80대 노인 연기는 50대 이성민에게 도전이었다. 특수분장을 한 후 노인이 된 모습을 처음 본 그는 신기한 감정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과 닮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노인 분장이 화면에 잘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나이가 있는 선생님들과 한 화면에서 연기해야 되잖아요. 저는 분장이니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서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필주의 얼굴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준비 과정도 오래 걸렸고, 테스트도 몇 차례 있었죠. 아내가 노인이 된 제 얼굴을 처음 보더니 엄청 싫어했던 기억도 있어요."(웃음)
노인의 얼굴을 완성한 이성민은 걸음걸이부터 자세까지 80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노인 연기의 공식처럼 계산해서 몸을 움직인 건 아니지만, '리멤버'에 출연하기로 한 순간부터 노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고. 자세와 걸음걸이는 물론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누르고 호흡을 긁으면서 소리까지 완성했다.
"후유증도 생겼어요. 구부정하게 있어서 촬영 중반부터는 목 디스크 같은 게 있는 상태로 촬영했죠. 조명이 아주 밝게 비출 때는 이질적인 느낌도 들었는데, 나머지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노인의 상태로 액션을 촬영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액션 콘티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고령의 노인이 싸우는 걸 표현해야 됐기에 속도 조절이 관건이었다. 수정을 거치면서, 원래 예상했던 속도보다 절반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액션이 아니잖아요. '느리지만 빠르게'가 중요했어요.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저속으로 촬영해야 돼서 힘들었는데, 액션팀도 '지금까지 한 것 중에 제일 어려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성민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인규의 역할이었다. 그 시대를 살면서 친일파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필주는 제법 그럴듯한 인물이다. 문제는 60년 전의 일이라는 거다. 이 이야기가 현대의 관객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인규의 시선이 필주와 얼마나 닿아 있느냐였다.
"인규는 현대를 살고 있는 젊은 친구의 눈높이를 가졌어요. 이 인물이 필주와의 여정에 동참하고 때로는 끌려가면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남주혁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죠. 그런데 굉장히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가 평범함을 잘 연기해 준 것 같아서 뿌듯해요."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젊은 친구와의 동행이에요. 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같이 어우러져서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보다 먼저 산 세대를 존중하고, 또 젊은 세대를 포용하고 이해하는 거죠. 필주와 인규처럼 동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유독 젊은 배우와의 합이 좋은 이성민이다. '미생'의 임시완과의 브로맨스로 인기를 끈 그가 이번에는 남주혁과의 브로맨스로 작품을 완성한 거다. 이성민은 후배 배우와의 호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존중이라고 밝혔다. 선배와 후배의 역할을 구분 짓지 않고, 나이에 상관없이 연기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존중하는 관계에서 연기를 해야 좋은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일단 서로의 벽이 없어야 되죠. 후배들과 연기할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연기해요. 그래야 본인이 갖고 있는 것의 100%가 나와요. 그런 지점이 앙상블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죠."
데뷔 37년 차의 베테랑 배우 이성민은 작품을 통해 꾸준히 도전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연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도 도전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다. '왜 배우를 계속 하냐?'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어느 날 문득 그 해답을 도전에서 찾게 됐다.
"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좀 더 잘하기 위해, 제 앞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전해요. 작품을 제안받을 때 '도전해 볼 만한가?', '내가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하면서 느낀 부족함은 다음 작품에서 더 잘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런 마음이 절 계속 연기하게 만들어요."
필주가 60년 동안 복수의 마음을 품고 있다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이뤘던 것처럼, 이성민에게도 죽기 전에 꼭 마치고 싶은 대업이 있을까. 이성민은 "아직 살 날이 많다"고 답하면서도 "다만 기억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내가 기억을 잃어간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도 있어요.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은 건 물론 가족도 있지만, 제가 배우였다는 사실이에요. 치매 걸린 분의 병문안을 간 적이 있어요. 예전에 정말 총명한 분이셨는데, 전혀 기억을 못 하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죠. 기억이라는 건 참 소중해요. 그만큼 제가 배우였다는 건 마지막까지 떠올렸으면 해요."
현혜선 기자 sunshin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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