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예감] 두 달 이율이 50%? 조선시대 양반 부인들의 재테크는? - 이한 역사 스토리텔러

KBS 2022. 11. 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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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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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시기 영의정까지 오른 유정현... 조선 초 국가 건설부터 예산 절약까지 경제 장악했던 인물
- 명문가 자손이자 부자, 돈 자체를 사랑하고 돈 모으는 데 관심 많아
- 조선 당시 은행 없으니 양반 부인 위주로 여윳돈‧쌀 등 빌려주고 이자 받는 고리대금업 융성
- 조선시대 국가 이자율 30%로 정해뒀지만 실생활에서는 원금의 2~3배까지 받는 경우 흔해
- 유정현, 긴축 재정에도 앞장... 각종 세금을 거두며 국가 행사 반대에 관리들 밥값까지도 깎아
- 빚 못 갚으면 하인들 시켜서 추심... 인센티브 제공하며 채권 추심 북돋아
- 양반‧선비‧노비 할 것 없이 빚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 많아... 빚이 빚을 부르는 꼴
- 유정현 화폐 제도 도입 주장... 지폐 안착시키려고 물물 교환 금지시켜
- 개인적으로는 모진 대부업자지만 조선 초기 부국 이루는데 일조... 긍정‧부정적인 면모 다 있어
- 유정현 재산 7만 석 정도... 호화로운 장례 치른 뒤 자손들도 문제 생기며 가문 몰락

■ 프로그램명 :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 방송시간 : 11월 2일(수) 09:05-10:53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방희 소장 (생활경제연구소)
■ 출연 : 이한 작가(역사커뮤니케이터)


◇김방희> 돈이라는 게 뭔가요. 이게 참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오늘은 내 돈만이 아니라 나랏돈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끼고 절약했던 조선시대 명사 한 분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산 정약용 선생도 우리가 모르는 면모를 많이 알게 됐죠. 경제생활이라는 측면을 들여다보면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과 다른 모습들이 많이 드러나는데. 유정현이라고 조선 초기에 재상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한평생 돈을 쫓았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 그의 삶이었는데 이게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뭔지 유정현의 일생을 이한 작가와 함께 따라가 보죠. 이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이한> 안녕하세요.

◇김방희> 사극 좋아하시는 분은 이분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왜냐하면 사극에 묘사된 거는 태종이 후계자를 정할 때 세자 자리는 이미 양녕대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누구로 할 것이냐에 대한 논란에서 이 유정현이라는 인물이 이른바 세종.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선택해야 된다는 옹위론을 펼치게 되는 거죠.

◆이한> 맞습니다. 원래 유교의 적장자 이론에 따르면 그 당시에 양녕대군 이미 아들이 있었거든요. 적장자의 아들 즉, 손자한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했지만 그때 유정현이 나서서 택현. 현명한 사람을 택하십시오라고 해서 그래서 충녕대군이 왕이 됩니다.

◇김방희> 셋째임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되면서 왕위를 차지하는 길을 연 사람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알려져 있고 보통 이런 분들은 사실 여러 가지 경제생활에서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은 분이라고 그러는데. 이분이 나중에는 웬만한 이른바 장관 자리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다 하시고 영의정. 그러니까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죠.

◆이한> 그렇죠. 거의 조선 초에 경제를 확 잡고 있었다 해도 무리가 아닌 분입니다. 워낙 집안 자체가 권문세족. 고려 안에서 손꼽히는 권문세족이었다가 그다음에 이분이 태조 때는 별일 없었다가 태종의 라인을 잘 탔어요. 태종 때서부터 발탁되게 되는데. 이분이 당시 조선을 건설하는 중이었잖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궁전 건설, 청계천 건설, 성벽이나 도성 건설까지 거기다 전부 다 관여를 했고 또 하나 이분이 했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대마도 정벌이었습니다. 이분이 총사령관이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가장 많이 기여한 것은 그 조선이라는 나라의 물리적인 기틀 궁전이나 도시를 닦거나 청계천을 정리하거나 할 때 예산을 절약하는 데 굉장히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김방희> 나랏돈 아끼는 데도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축재. 그러니까 돈을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라고요.

◆이한> 정말 대단한 분인 게 이분이 워낙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아까 얘기했듯이 명문가의 자손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워낙 돈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일단 이것은 민담입니다만 자기 집에 과일 나무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과일을 하나하나 다 따서 시장에 가서 팔아요. 정승인데. 그런데 팔 때 과일의 씨를 전부 빼서 팔았다고 합니다.

◇김방희>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이한> 남들이 가져가서 심을까 봐. 그리고 심지어 자식들한테도 미두. 그러니까 이만큼의 쌀도 주지 않았던 걸로 유명한 게 실록에까지 나와 있습니다.

◇김방희> 그렇군요. 그야말로 좋게 보자면 근검절약 나쁘게 보자면 축재의 화신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텐데. 이분이 빚을 내주는 거 그러니까 일종의 고리대금업이죠. 이런 걸로 돈을 벌었다는 기록 정도는 나와 있는데. 그 당시는 은행도 없었고. 저도 모르겠네요. 조선시대 고리 대금업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이한> 사실 조선시대의 고리대금업은 굉장히 융성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돈이 있으면 돈이나 곡식이 있으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은행이 없으니까 우리가 돈이 필요하면 옆집에 가서 통통 두들기면서 쌀 한 말 빌려주세요. 동전 몇 닢 빌려주세요라는 걸 얘기를 하게 되는데. 가장 많이 고리대금에 종사했던 사람이 양반의 부인들이었습니다. 양반의 부인들이 여윳돈이나 여유 쌀을 빌려주고 그걸 기록했다가 이자를 쳐서 받아냈는데. 주 고객은 자기 집의 노비들이었고 그다음에는 이웃집 사람들 갑자기 급전이 필요할 때.

◇김방희> 하긴 예전에는 이웃에서 융통했죠.

◆이한> 그렇죠. 다 외상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외상 달아놓는다 이런 식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큰돈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결혼을 한다거나 과거를 친다거나 아니면 장례식 치른다거나 그 큰돈이 필요하면 큰돈을 빌릴 수 있는 데에 갈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이자도 많아지죠.

◇김방희> 그 당시 그러면 갑자기 드는 호기심이 이자가 얼마나 됐을까요. 요즘하고 비교할 바는 아닙니다마는.

◆이한> 아니, 요즘보다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일단 국가가 정한 이율은 30%입니다. 그것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낮아진 거였어요.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가 정한 이율이었고 당연히 실생활에서 훨씬 더 많이 받았죠. 지금 규장각에 있는 고문서를 몇 가지 살펴보면 박소사라는 여인이 이제 밭을 한 150전을 담보로 돈을 한 1000냥 빌린 게 있는데. 5부 이자입니다. 5부 이자고 그게 한 두 달 내에 갚아야 돼요. 그리고 두 달 내에 못 갚으면 이 담보로 맡겼던 돈은 넘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무엇을 빌리냐에 따라 이율이 또 달랐습니다. 곡식으로 빌리면 이율이 50%. 만약에 돈으로 빌리면 60~70%. 그리고 당연히 경강상이나 급전 빌릴 때는 원금의 두세 배 정도 이자를 받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당연히 대명률이나 경국대전에서는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게 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이걸 지키는 사람은 있었을까.

◇김방희> 없었겠죠. 왜냐하면 자본시장 자체가 발전하지 않아서 사실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원천 자체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수급이 늘 불일치했겠죠.

◆이한>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적은 시를 보면 서거정이 지은 시나 그다음에 정약용이 지은 시를 보면 이제 그 빚을 못 갚아서 정말 손이 닳도록 손이 터지도록 일하면서 나라의 빚을 먼저 갚을 것인가 사채를 먼저 갚을 것인가 괴로워하는 그런 내용의 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김방희> 유정현이라는 정승은 개인적으로도 돈에 집착하지만 그랬다면 사실 이 사람을 오늘 돌아볼 필요는 없는데 우리가 인정해야 될 것은 자신이 그랬듯이 나라의 재정도 아주 한 푼 새지 않게 절약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경제통인 거죠.

◆이한> 그렇죠. 사실 유정현이 고리대금업자로는 너무 악명이 높아서 당시 백성들이 내가 굶어 죽어도 영의정의 장리 그러니까 고리대금은 안 빌리겠다고 할 정도였고요. 그리고 또 어느 정도로 이 사람이 일에 철두철미 했냐면 세종이 걱정한 거예요. 이제 백성들이 굶주린 것 같으니까 환곡, 곡식을 풀자. 그때 유정현이 하는 말이 아직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자기 부하들이 돌아다녀서 보니까 제가 돈 빌릴 사람 하면서 돌아다니니까 제 곡식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 아직 백성들이 그렇게 안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왕 앞에서 해요. 그래서 세종이 그 말 안 듣고 풀었습니다. 곡식을.

◇김방희> 그렇죠. 환곡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 세종도 그러니까 이 곤궁기에 빌려주고 나중에 추수할 때 이자를 붙여서, 이자를 30% 붙여서 받는 거죠.

◆이한> 그래서 그것도 환곡도 절대로 싼 게 아니라서요. 조선 후기 가면 이게 또 고리대금업이 돼요. 국가가 백성들을 상대로 이자 놀이를 하는 그런 사태가 돼서 나중에 영조가 한 번 크게 탕감하고 그랬습니다. 빚을 다 없앴죠. 그리고 유정현 얘기로 돌아가서 유정현이 그렇게 구두쇠였습니다만 자식들한테도 빡빡하게 굴 정도로. 그런데 이 사람이 신기한 게 나라 일을 하는 곳에서 그렇게 처신을 잘했어요.

◇김방희> 아주 긴축 재정을 잘 한 것으로 유명하잖아요.

◆이한> 그래서 당시 공신들한테는 영원히 세금을 거둘 수 없는 그런 밭을 선물로 줬거든요. 그런데 유정현이 거기에 한계를 두자. 세금 걷어야 된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건축을 세우거나 그럴 때도 예금을 재정을 팍팍 깎아요.

◇김방희> 예산을 내놓으면 깎는 거죠.

◆이한> 그래서 그 당시 조선의 건설자로 유명한 사람이 박자청이라고 했거든요. 이 사람은 정말 평민에서 출세해서 거의 모든 경복궁이나 그런 건물을 건축한 되게 유명한 건축사의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하고 유정현하고 같이 다녀요. 어떤 난리가 벌어졌을 때 딱 보이더라고요. 이 사람은 건물을 멋있게 짓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장인이었고 유정현은 돈을 깎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정말 심하게 투닥거렸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유정현이 얼마나 꼼꼼했냐 하면 옛날 조선시대 때 관리들은 새벽에 출근해서 한 오후 서너 시쯤에 퇴근하지 않습니까. 원하면 중간에 점심밥을 줘요. 그런데 유정현이 그걸 삭감해 버립니다.

◇김방희> 구내식당 없애자 이런 거군요.

◆이한> 네, 그 밥 주는 비용을 아낀다. 그런데 그걸 누가 알게 됐냐, 세종이 알게 됐어요. 세종이 그래서 그 당시 호조 판사였던 사람이 안순이었거든요. 안순은 불러다가. 아니, 절약하는 건 좋은데 써야 할 때 안 쓰면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밥을 어떻게 굶기냐. 세종대왕님이 참 훌륭한 왕이라는 게 밥에 참, 본인이 밥 드시는 것도 좋아했지만 남이 배고픈 것도 굉장히 많이 신경을 쓰셨어요. 그래서 왕자 때도 우연히 길을 걷다가 백성들이 하나 와서 제가 너무 굶주렸어요라고 얘기하자 그 당시에 그 자리에서 당장 태종한테 달려가서 백성들이 굶고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던 분이고 그때 온천을 다녀오면서 병조판서가 지나가다가 임금님 저기 들판에 백성들 한 30~40명이 있는데 배가 고파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까 세종대왕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내가 여기 있어서 저들이 굽는 거 아니냐. 빨리 먹을 거 마련해라 그렇게 밥에 많이 신경 쓰신 분인데 자기 신하들이 나라 일을 하는데 굶는다고 하니까 그것 때문에 어떻게 밥을 안 줄 수가 있냐고 호조 판사한테 얘기했는데 호조 판사가 하는 말이. 곡식을 들고 내는 거는 다 유정현이 한 일이라서 저는 몰라요. 라는 얘기를 했는데 실록의 평에 따르면 이 안순이라는 사람이 워낙에 너그러웠다고 해요. 그런데 유정현하고 같이 일하다가 보니까 그 사람한테 물들어서 되게 각박해졌다고.

◇김방희> 지금으로 치자면 기획재정부에서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게 만든 건데. 유정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참 흥미가 갑니다. 구체적으로 더 얘기를 해볼 텐데 벌써 많은 분들이. 김미경 님은 노비한테 이자 장사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어서 약간 충격을 먹었나 봅니다. 그렇게 돈 모아서 뭘 했나요. 하는 얘기도 해주셨고. 이상목 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금융이 무섭네요. 해 주셨는데. 지금은 그래도 공공은행이나 이런 것들이 공공성이 강한 은행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때는 사금융밖에 없었으니까 더 무서웠겠죠. 김진희 님은 예나 지금이나 돈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늘상 더 고달팠군요. 해 주셨는데, 맞습니다. 이 유정현이라는 분은 정말 돈, 돈, 돈밖에 모르는 인물이었습니까?

◆이한> 유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불교 행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불경을 외운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이 반대를 했고요.

◇김방희> 그랬겠죠. 예산을 낭비한다고 보는 입장이었을 테니까요.

◆이한> 그리고 대표적인 게 그때 태종 때 코끼리를 바쳐서 한동안 코끼리를 키운 적이 있는데. 유정현이 했던 말은 왜 콩을 수백 석씩이나 낭비해야 되냐.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이분이 정말 그 돈 문제에서는 사리사욕이랄까 공사 구분이 없이 아주 정말 냉정했거든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 대로 자식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쌀 주지 않고. 심지어 효령대군의 장인인 사람이 종이 빚을 안 갚았다고 하니까 하인들을 보내서 그 집 가마솥을 뽑아옵니다. 그래서 효령대군이 그 유정현의 아들을 불러서 너희 아버지 돈 많은데. 돈도 많고 나라에 큰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러냐. 내가 우리 동생한테 일러바치겠다는 얘기를 하니까 그 아들이. 저희 아버지는 제 말 안 들으니까 딴 사람한테 알아보세요, 하고 그리고 가버립니다.

◇김방희> 지독하네요. 그런데 지금 말씀해 주신 것 가운데서 하나. 그러니까 채권 추심을 한 거잖아요. 가서 직접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솥 뽑아오게 하고. 그 추심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인데요.

◆이한> 그렇죠. 유정현이 이런 데도 굉장히 유능했다는 게 하인들을 팀으로 나눠서 제일 잘 추심한 사람한테 인센티브를 줬습니다. 그러니까 하인들이 더더욱 열심히 추심을 했죠. 가마솥 뽑아오면 조선시대 때는 밥도 못 짓고 요리도 못 했기 때문에 그냥 굶는 거잖아요.

◇김방희> 그러니까 아까 그 노비의 빚이라고 했는데 실제 양반이나 정승가 같은 데는 본인이 노비 이름으로 빚을 지는 이런 거. 차명, 가명 부채가 많았던 모양이죠.

◆이한> 그렇죠. 조선 후기에 이덕무라고 되게 가난했던 사람 같은 경우에는. 이덕무는 백탑파라고 해서 정조 때 사람입니다.

◇김방희> 아, 실학파의 초기 세대죠.

◆이한> 네, 이 사람은 가난했거든요.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이 사람도 자기가 빚을 졌어요. 그런데 빚을 갚지 못하니까 자기 종이 대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어떡하지 라고 하니까 친구가 골동품을 하나 가져와서 이걸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네 종을 풀어줘라 그래서 이 골동품을 가지고 전당포에 갔는데 돈을 많이 안 쳐줘서 못 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한탄하는 시도 남아 있습니다.

◇김방희> 그렇군요. 한 가지 오늘날 세태와도 관련이 있는 게 빚의 무서움. 뭐 이런 것들이 당시 일화로도 확인이 되는데 양반가라든가 이런 쪽에서도 빚이 고통스러웠던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죠. 그러니까 선비나 양반가 혹은 심지어 권력의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도 재산이 없어서 고통을 받았습니까?

◆이한> 굉장히 많이들 가난했고요. 대표적인 이야기로 조영덕이라고 해서 흥선대원군 시기 때 있던 사람인데 풍양 조씨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명문가로서의 자부심도 있고 학자였는데 돈이 없어서 시골에 내려가셨는데 문제가 시골에 내려가서 서울 때 흥청망청 쓰던 약간 소비의 규모를 줄이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비싼 종이, 비싼 붓, 비싼 먹 쓰면서 나는 이런 거 아니면 못 쓴다고 하니까 돈이 없어지는 거죠. 게다가 큰돈이 드는 게 결혼식 그리고 과거 준비, 과거 준비할 때 보통 1년 생활비가 들어요. 40, 50년 정도 그리고 부인이 죽어서 장례식 치르는 거, 그런 식으로 점점 빚이 많아지니까 풍양 조씨잖아요. 그 당시 유명했던 그 풍양 조씨 세도가 조카한테 이 돈 좀 갚아줄 수 없니 라고 하지만 그것도 안 되니까 그 지역에 있는 돈이 많은 상민들이나 평민들한테 돈을 또 꿔요. 그 돈을 꿔서 융통은 하지만 빚은 점점점점 늘어나고

◇김방희> 빚이 빚을 부르는 거죠.

◆이한> 그러니까 또 출세한 다른 풍양 조씨 조카들한테 편지 보내요. 너 돈 좀 갚아줘라. 그래서 편지를 보면서 참 이분은 또 이게 그러면서도 비싼 그 생활을 버리지는 못하고

◇김방희> 하루아침에 바뀌겠습니까? 이 풍양 조씨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권문세도가인데요.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경제에 대한 시각과 환경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조성빈 님이 성공 예감 모든 코너가 좋지만 특히 이 코너는 경제와 역사를 잘 버무린 코너 같습니다. 보통 역사는 교훈으로 귀결되는데 경제와 콜라보하니까 협업을 하니까 굉장히 흥미로워서 잘 듣고 있습니다. 했는데 사람 사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다를 바 없고요. 이걸 통해서 또 보고 느낄 만한 게 많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하고 있고요. 이제 유정현이라는 정승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혹은 나라 전체로 돈을 아끼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화폐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로도 유명하죠.

◆이한> 대단히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려도 그렇고 심지어 조선도 숙종 때까지 화폐 제도가 별로 없었는데 세종 때 화폐 제도를 도입하자 라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어떤 화폐를 사용할 것인가 지폐냐? 동전이냐? 아니면 천이냐? 선택했는데 유재환은 지폐를 강력하게 밉니다.

◇김방희> 상당히 앞서 나간 분이군요.

◆이한> 그렇죠. 그러니까 이분이 또 중국도 다녀온 적도 있고 돈을 워낙 잘 아니까 동전에 비해서 가볍거나 그런 좋은 점을 이해했었던 것 같아요.

◇김방희> 그런데 지폐라는 게 워낙 혁신적이어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

◆이한> 사실 원나라 때는 사용했지만 명나라 때는 은으로 돌아갔고요. 조선도 상당히 뿌리 내리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걸 어떻게든 해보시겠다고 그 당시 유정현이 70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장에 매일같이 출근을 해서 시장에서 계속 일했어요. 그러면서 지폐를 쓰지, 그러니까 돈을 쓰지 않는 사, 물물 교환을 하려는 사람은 불문곡직을 잡아서 엄하게 처벌을 하고 돈을 억지로 쓰게 정책을 진행했습니다.

◇김방희> 지폐를 안착시키려고 물물 교환을 금한 거군요.

◆이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시 70살이었고 7월이었거든요. 굉장히 더운 시대인데 매일매일 시장에 나가서 일을 하셨는데 그러다 보니까 정말 그냥 잘 모르는 그런 시골 아낙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집에서 키운 상추나 배추 같은 거 가지고 팔러 나왔다가 곤장 맞고, 재산 뺏기고, 어떤 사람은 그 수군에 충당되어 버린 그런 일도 있었고

◇김방희> 징발됐군요. 그쪽으로.

◆이한> 그 일 때문에 그 부인이 목을 매달고 자살하는 일까지 있었고요. 그리고 또 걸린 게 유정원의 조카가 걸렸습니다. 급하게 돈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잡힌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유정원은 자기 친척인, 그러니까 조카가 유정현에게 부탁을 했죠. 저 한 번만 봐주세요. 유정현은 네가 국법을 어겼으니 봐주는 거 없다. 그렇게 했는데 그러니까 이 조카가 어떻게든 자기 종을 끌어다가 얘가 한 거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해서 어떻게 빠져나가긴 했는데요. 아무튼 모진 사람이죠. 그래서 실록에서도 그러는 게 상홍양이라는 그 홍미라고 있지 않습니까? 조선 한나라 시대 때 거기에 비견하는 사람입니다.

◇김방희> 흥미로운 게 왜 지폐가 이렇게 정착하기가 어렵냐 하는 말씀을 잠깐 드리냐면 화폐의 역사에서 지금 디지털 화폐가 나오고는 있습니다마는 최종적인 화폐인 이유는 사실 종잇조각이잖아요. 거기에 국가가 신뢰를 부여하는 건데 이게 조선시대에 쉽게 될 리가 없었겠죠. 물물 교환이 훨씬 편했고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였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지폐를 안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기 신념이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 일 이후에 바로 돌아가시죠. 그분이?

◆이한> 한 1년 정도 연착하시고 지폐 그 자체는 한 3개월쯤 뒤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세종이 중단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한 1년쯤 뒤에서부터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계속 사퇴하게 사임하겠다고 했는데 세종이 거절해요. 그래서 너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겨우 겨우 사임을 하고 사임한 지 나흘 만에 돌아가십니다.

◇김방희> 그렇군요. 이런 인물을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요. 저희는 사실 사극에 등장하는 그 면모만 봐왔기 때문에 세종이라는 성군을 배출한 주 세력 중에 한 명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분도 워낙 좋았고 현명한 사람을 선택해야 된다는 거니까 그런 면만 봤는데 내부를 들여다보니까 개인적으로는 아주 모질다는 얘기가 절로 나올 만큼 대부업자이자 아주 이 돈에 집착하는 분이었고 또 이게 나라 전체 조선 초기의 부국을 이루는 데 일조했으니까 또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부정적인 면들도 분명히 드러나고요. 어떻게 평가합니까?

◆이한> 사실 정말 권력과 돈의 화신이었다고 할까요? 정말 권력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따라갔고 돈의 냄새도 기가 막히게 따라가서 사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더 있을까 싶고 또 이런 사람을 이렇게 잘 쓸 수 있는 왕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세종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데 능력이 워낙 출중하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예산 절약을 잘 하고 그 플랜을 짤 수 있는 사람은 또 드물었을 테니까요. 글쎄요. 어쩌면 정조와는 더 합이 잘 맞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공과 과가 너무나도 확실해서 어느 쪽도 버릴 수 없고 어느 쪽도 눈 감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조선 초기에 필요했던 건 사실이에요.

◇김방희> 그렇겠죠. 어떤 나라가 건국의 틀을 만들 때는 이런 테크노크럿. 특히 경제통이 꼭 필요한 법이 있는데 그 많은 돈 다 짊어갈 수는 없었을 테고. 그 이후에 자녀들이 권문세가를 이룹니까? 아니면 그 돈 다 어디 갔습니까?

◆이한> 이게 참 안타까운 일인데 역시 죽을 때 쥐고 갈 수 없다는 것처럼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이 돈이 다 사라져버린 게 일단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둘이 전부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유능했거든요. 첫 번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두 번째 아들은 바로 아까 얘기한 아버지는 내 말 안 듣습니다 했던 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유정현이 죽을 때 아들한테 부탁을 해요. 나를 위해서 수륙재라고 불교 행사를 해 달라.

◇김방희> 본인은 정작 불교 행사를 경원시했으면서.

◆이한> 아마 죽기 전이 되니까 역시 마음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정현의 재산이 약 7만 석에 달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저도 감흥이 안 돼서 심청이를 단위로 계산해보니까 한 인당수에 233번 뛰어들어야 얻을 수 있는 그만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서 수륙재를 굉장히 초호화판으로 치러서 5000석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치렀으니까 당연히 온 나라가 들썩였죠. 그래서 나중에 세종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해요. 자기는 나한테는 불교 하지 말라고 해놓고 자기는 그 불교 행사를 치러서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게 여겼다라고 하지만 그런 얘기를 굳이 신하들 앞에서 한 거는 세종의 마음도 포함돼 있는 거겠죠. 그리고 또 그다음에 문제는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얼마 안 돼서 아들이 또 죽어요. 그래서 두 아들이 죽고 이제 첫 번째 아들의 그 손자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렇게 출세는 많이 못했고요. 그다음에 또 손녀딸이 있었거든요. 이 손녀딸은 사촌 오빠랑 바람이 납니다.

◇김방희> 당대의 스캔들이었겠군요.

◆이한> 그렇죠.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이거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길이다 해서 지방으로 쫓겨 갑니다. 이후에 자손들의 얘기가 안 나온 걸로 봐서.

◇김방희> 가문이 몰락했다고 봐야 되겠군요.

◆이한> 돈이 어떻게든 일단 제일 궁금한 돈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아마 흩어지지 않았을까.

◇김방희> 유정현이라는 사람의 삶을 쫓아가면서 돈. 또 이 경제 활동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저희 아버님도 그런 편이었는데 우리 청취자 한 분도 이 쌀가마니로 빚을 졌던 시절의 추억을 얘기해 주고 계십니다. 고명석 님이 50~60년대 고리이자가 팽배해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쌀 한 가마니 빌리고 다음에 농사지어서 두 가마로 갚았습니다. 이자율이 대단한 거죠.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어서 봄이면 굶었습니다. 그렇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고 김진희 님이 사람보다 늘상 돈이 대우 받네요 그랬는데 영원히 그런 건 또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는 거죠. 이 얘기를 통해서 1400년대 조선 초기. 고려 말부터 시작해서 1400년대를 잘 살았던 한 인물. 유정현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요? 2022년 현재 시사하는 바는 뭘까요? 저도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마는.

◆이한> 일단 이분은 좋고 나쁜 걸 떠나서 돈을 정말로 좋아했던 분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 돈도 아끼지만 나랏돈도 아끼고 허투루 돈이 쓰이는 걸 도저히 못 견디는. 그래서 아마 되게 구두쇠처럼 본인은 되게 청렴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실제로 세종도 이 사람에 대해서 청렴하다는 이야기를 썼거든요.

◇김방희> 그래서 이분 평전들 보면 다 근검절약, 청렴 이 얘기가 나오더군요.

◆이한> 그렇죠. 사극 같은 데서도 다 떨어진 옷 입고 나오는 식으로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분이 그리고 또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장점을 가지고 확실히 활용했던 건 사실이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건 역시 아까 얘기하신 대로 그 돈 다 싸고 갈 것도 아닌데 약간 유정현과 반대적인 사람이 있어요. 저는 수륙재를 하기보다는 그동안 지었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가면 어땠을까 그 생각도 들죠. 사실 조선 후기에 유명한 변상업이라고 역관이 있는데 그 사람은 조선시대에 조선의 당시 자기한테 빚진 돈이 50만 냥이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병들어 죽으려고 하자 자식들이 야, 이 돈 빨리 추심하자라고 하니까 변상금이 그렇게 하면 서울의 경제가 무너진다 해서 그 50냥을 전부 탕감해 줬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돈은 정말 중요한데 좀 너그러워질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김방희> 돈이라는 건 수단에 불과하고 결국 돈과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인데 행복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니까.

◆이한> 가족들하고도 사이도 안 좋았을 것 같고요.

◇김방희> 또 한 가지는 빚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빚에 대해서, 부채에 대해서 알게 됐는데 빚 무섭다는 얘기도 좀 실감나지 않습니까? 사실 경제 활동을 막 시작하는 분들 같은 경우는 빚 무서운 걸 잘 모르거든요.

◆이한> 그렇죠. 무섭더라고요.

◇김방희> 지금 뭐 그 당시처럼 고금리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금리가 이렇게 살짝 변하기만 해도 고통이라는 게 아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가오는데 그 당시에 또 고리대금업과 부채의 엄중함은 어땠는지도 실감나고요.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오늘은 유정현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선 초기, 경제 활동. 또 그것이 주는 시사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오늘 말씀도 흥미로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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