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기자부터 킴 카다시안까지… ‘여자어’의 탄생으로 본 차별의 역사[플랫]
어맨다 몬텔 지음·이민경 옮김|아르테|352쪽|2만4000원
배우 주현영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의 유일한 친구 동그라미를 연기했다. 주현영은 거침없고 솔직한 동그라미 이전에는 떨리는 목소리의 긴장한 사회초년생 여성을 연기했다. 지난해 쿠팡플레이의 <SNL 코리아>에서 방송 즉시 화제가 된 주현영 인턴기자는 ‘음…, 어…’ 같은 확신 없어 보이는 말투, 긴장된 느낌을 주는 떨리는 음성으로 20대 여성들의 말투를 흉내냈다.
떨리는 목소리, 말꼬리가 올라가는 말투의 주 기자는 정확한 발음과 단호한 어투로 질문을 던지는 앵커의 화법과 대조되어 더욱 미숙해 보였다. 주 기자의 모습은 공적 발화가 익숙하지 않고, 권위를 갖기 힘든 젊은 여성의 불안을 ‘리얼하게’ 재현해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웃음거리로 삼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주 기자는 계속해서 미숙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머무는 대신 기자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비판을 잦아들게 했다. 하지만 주 기자를 둘러싼 논란에는 젊은 여성들의 말투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평가가 반영돼 있다.
한국에 주 기자가 있다면, 미국에는 저음의 떨리는 음성인 ‘보컬 프라이(vocal fry)’가 있다. 보컬 프라이는 갈라지면서 탁하고 낮은 음색으로 문장 끝에서 말소리가 잦아들면서 진동하는 목소리를 뜻한다. 미국에선 인플루언서 킴 카다시안의 습관으로 유명해졌으며, ‘젊은 여성’들이 많이 쓰는 말투로 여겨진다. 보컬 프라이는 조롱의 대상이 됐으며 “젊은 여성의 무능력을 뜻하는 대중적 상징”이 되었다. 2014년 애틀랜틱은 보컬 프라이를 쓰는 여성들이 고용될 확률이 낮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보컬 프라이가 과연 ‘무능한 젊은 여성’만의 말투일까. 연구 결과 보컬 프라이는 처음엔 주로 남성들에게서 나타났다. 1960년대 영국 남자들은 더 높은 사회적 기준으로 소통하고자 할 때 보컬 프라이를 쓰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인 여성이 남성보다 보컬 프라이를 7% 더 사용하고, 갈라지는 소리는 더 심해지고 있다. 2010년 언어학자 이쿠코 퍼트리샤 유아사는 보컬 프라이가 음역을 낮게 내기 때문에 여성들 목소리가 더 권위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남성에 비해 사회적 권위가 낮은 여성들이 사용한 언어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언어학자 어맨다 몬텔의 <워드슬럿>은 사회언어학의 관점에서 언어에 스며있는 젠더의 권력관계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여성들을 향한 비속어의 역사부터 시작해 ‘여자어(lady language)’라고 불리는 말투가 저평가 받아 마땅한지를 언어학적으로 따져 들어간다.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영어의 형성과정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화 과정에 스며든 젠더 차별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영어는 군인, 귀족, 상인, 노동자, 인쇄업자, 사전 제작자들을 통해 고대 영어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 영어로 발전했다. 언어를 형성하는 데 관여한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언어는 권력 구조와 사회규범을 반영하고 그것을 강화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남성들은 집단의 언어를 비교할 때 여전히 보이지 않는 표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욕설이나 비속어엔 이런 젠더 권력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UCLA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은어 가운데 90%가 부정적이었으며, 남성에 대한 은어는 46%만이 부정적이었다. 영어에는 섹스와 젠더에 기반한 모욕이 풍부하게 존재하는데, 여성에 대한 부정적 용어들은 주로 성적 함의를 띠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을 묘사하는 단어가 처음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뜻을 갖고 있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인 함의를 띠다가 결국에는 성적인 모욕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서(sir)’와 ‘마담(madam)’의 차이가 대표적이다. 300년 전 두 단어 모두 존칭이었다. ‘서’의 지위는 건재한 데 반해, ‘마담’의 의미는 극적으로 실추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담은 조숙하거나 자만한 여자아이를 나타내다가 정부나 성판매자를 지칭했고, 성판매업소를 운영하는 여성을 나타내게 됐다. 한국에서도 마담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마스터(master)’와 ‘미스트러스(mistress)’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둘 다 권위 있는 이를 지칭했다. 마스터는 여전히 책임지는 남자, 어려운 기술을 획득한 사람을 뜻하는 반면 미스트러스는 기혼 남성과 바람을 피는 여성을 지칭한다.
슬럿(slut)은 한국어로 옮기면 ‘걸레’에 해당되는 여성 대상 비속어다. 중세 영어에선 ‘칠칠치 못한’ 여자를 의미했으며 남자에게도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적으로 ‘헤픈’ 또는 성판매자를 뜻하다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포르노에 많이 쓰이는 단어가 됐다.
언어는 젠더 권력을 반영하며, 언어를 통해서 젠더 권력이 생성된다. “사람들은 대화를 하는 방식 때문에, 대화를 통해 받는 피드백 ‘때문에’ 젠더를 갖게 된다. 언어는 젠더를 삶으로 가져온다.” 기존 언어는 성차별적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한편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성소수자들을 배제했다. 성소수자들이 다양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표현할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19세기 독일의 마그누스 허슈펠트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하여 64개의 유형을 만들었다. 규범에 비순응적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이름을 붙여, 이런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도덕적 실패’가 아님을 입증하려 했다. 그의 시도는 200년이 지나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중반 ‘논바이너리(nonbinary)’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됐으며, 2018년 캘리포니아주는 논바이너리를 공식 출생증명서의 세 번째 성별로 올렸다. 오리건주는 운전면허증에 논바이너리인 ‘X’를 표시할 수 있다.
세상이 너무 변한 것 같은가? 인도의 ‘히즈라’는 널리 알려진 존재다. ‘지정성별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부를 수 있겠지만, 이들은 전통적으로 제3의 성별로 존재하며 다른 이들의 생식 능력을 저주하거나 축복하는 고유한 젠더 역할을 수행했다. 인도네시아 부기족엔 여성, 남성, 칼랄라이, 칼라바이, 비수 등 5개의 젠더가 존재한다. 도미니카공화국엔 유전적 간성 조건이 높은 5-ARD가 높게 발생해 여성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춘기를 지나며 몸이 남성화되는 아이들을 ‘게베도세’(12세에 남자 성기)로 부른다. 반면 파푸아뉴기니엔 똑같은 특징을 보이는 이들을 제3의 성별인 ‘터님-맨’으로 부른다. 같은 몸을 지니고 있더라도 문화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주 기자의 말투로 돌아가보자. 주 기자의 말투는 ‘여자어’의 핵심을 모아놓은 것에 가깝다. 말끝을 의문문처럼 올리는 ‘업토크’, ‘음, 어’와 같이 짧은 음절로 이뤄진 ‘최소 반응’, ‘그니까(like)’와 같은 말의 잦은 사용 등은 여성의 확신 없음, 불안정성 등을 드러내는 말투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인식이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런 말투를 ‘헤징(hedging)’이라고 하는데, 방어를 위한 말들은 매끄럽고 개방적이며, 다른 화자의 관점을 확인하면서 대화를 협력적으로 이끌어가는 기능을 한다고 평가한다.
업토크는 실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홍콩 연구에 따르면 영어 사업 학술대회에서 ‘장(長)’의 위치에 있는 이가 하급자보다 업토크를 7배 더 많이 사용했다.
저자는 젊은 여성의 언어가 ‘언어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업토크’와 ‘보컬 프라이’가 미래의 언어라고? 억지 같지만 일리가 있다. 기존 언어와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중년 백인 남성’ 같은 언어에 내재된 위계질서에서 우위에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불편한 이들은 언어체계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 역사적으로 가난한 젊은 여성들, 이주자 여성들이 사회적 이동을 위해 외국어를 배워 공동체 바깥으로 나갔으며, 많은 문화의 여성들이 언어적 제한을 넘어서고자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었다. “여성들에게 언어는 억압을 견디거나, 저항하는 복잡한 방식이었다.” 미국 영어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은어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방언으로부터 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성과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이 언어를 통해 힘을 얻는 방식은 연결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까?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에선 1970~1980년대 페미니즘 제2의 물결과 함께 페미니스트 사전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리베카 솔닛에 의해 대중화된 ‘맨스플레인’(남성이 여성의 말을 끊고 설명하려는 태도)은 많은 여성들에게 익숙한 상황이지만 이를 묘사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던 틈을 매워준다.
한국에도 젠더중립적 언어를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남편이 죽은 여자를 뜻하던 ‘미망인’은 ‘아직 죽지 못한 존재’라는 뜻 때문에 이제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됐다. 결혼적령기를 지난 비혼 여성을 비하하는 ‘노처녀’ 또한 이제 시대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시댁을 시가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꿔 부르는 것 또한 언어에 내재된 성차별적 의미를 중립적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다.
언어의 변화 속도는 느리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저자는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의 성차별적 요소와 지탄받는 ‘여성적 말투’에 있는 언어적 기능을 인지하고서 “조금씩이라도 (가부장적 미래의) 반대 지점으로 우리 문화를 옮겨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워드슬럿>은 그 시작을 위한 훌륭한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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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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