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줄잇는 언덕길 작은 주택···15년차 극단 ‘하땅세’ 공연장입니다
극단 하땅세 연출가 윤시중 인터뷰
낙산 성곽길 인근 주택가에 자리잡은 독특한 극장서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2’ 공연
부엌·화장실·현관 등 모든 곳이 무대
서울 지하철역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나와 굽이진 골목길을 10여분쯤 따라가다 보면, 낙산 성곽길 아래 작고 오래된 주택이 관객을 맞이한다. 부지런히 언덕을 오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기 극단 하땅세인데요, 잘 오고 계신가 해서요.”
관객의 초행길을 염려하는 극단의 전화를 받으며 공지된 장소에 도착하면, 작은 대문에 붙은 공연 포스터가 이곳이 공연장임을 알린다. 주택가 작은 골목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단층집 마당엔 감나무 한 그루가 자리했고, 담벼락 앞에는 잠시 쉬었다 가라는 듯 의자 몇개가 쪼르르 놓였다. 여느 평범한 가정집 같은 이 공간은 극단 ‘하땅세’의 공연장. 1970년 지어져 50살이 넘은 이 작은 집이 100년의 이야기를 담을 연극 무대가 된다.
극장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오는 12일까지 이곳에서 공연하는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2>는 오래된 주택의 일반 조명 아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소재들을 소품으로 삼아 진행된다. 작은 안마당은 관객들이 대기하는 로비가 되고, 공연 전 배우들이 관객을 맞이하며 신발을 받아 정리해준다. 마치 친구의 집을 방문한 듯 안내를 받아 공연장 안에 들어서면, 나무 마루 아랫목에 30여개의 객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객석 맞은편 부엌과 화장실, 그 옆으로 나 있는 현관과 창문이 모두 이 공연의 ‘무대’가 된다. 흰 벽면 때묻은 전등 스위치 위로 삐뚤빼뚤 쓰인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라이트하우스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작은 무대서 재탄생한 거대한 이야기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지난해 11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1부를 처음 선보인 뒤, 서서히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며 이른바 ‘회전문 관객’까지 낳은 연극이다. 중국 소설가 류전윈의 장편소설을 중국 실험극의 선구자로 불리는 머우썬이 2018년 각색한 작품으로, 신중국 성립 전후 100년간 5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100년을 아우르는 큰 이야기를, 오히려 가장 작은 공간에 압축해 보여주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녁 공연을 앞두고 배우들이 연습에 분주하던 1일 오후, 라이트하우스에서 윤시중 연출(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을 만났다.
이 단층집은 극단 단원들이 연습을 하다 쉬거나 씻기도 하고 밥도 해먹는 공간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식당 공간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곳에서 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라이트하우스는 공연장으로 등록돼 있다). 예기치 못한 팬데믹으로 극장이 문을 닫고 모두가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시기, 역설적으로 이 작은 주택이 극장이 돼 관객을 불러온 셈이다. 윤 연출은 “주택가 외진 곳에 위치하다 보니, 처음엔 관객분들이 이렇게 먼 데까지 찾아올까 하는 고민도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특성이 더 장점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익숙한 공간이지만, 오시는 분들에겐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관객을 집에 오는 손님처럼 맞이하되, 연극이 시작하면 서서히 공연장이란 개념으로 의식이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이 어디서든 가능하다면 이곳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실험의 차원도 있었어요. 이 연극 자체가 집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주택 사이사이 골목길을 걸어 돌아가죠. 어떤 관객은 그 골목길 안 집들을 지나며 연극의 질문을 곱씹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공연이 끝나도, 그렇게 공연장 밖으로도 연극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지난해 5월 국립극단과 한·중연극교류협회가 주최한 중국 희곡 낭독 공연을 통해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연극의 시작점이 된 이 낭독 공연에는 하땅세의 단원 23명 전원이 무대에 올랐고, 같은 해 11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통해 본 공연을 시작한 뒤 관객들의 호평 속에 오픈런 공연으로 이어졌다. 100년에 걸쳐 온갖 직업과 성씨를 지닌 사람들이 부대끼며, 끝내 듣지 못했거나 하지 못한 ‘말 한마디’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윤 연출은 “드라마틱한 전개나 어떤 선명한 메시지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이야기를 그저 지나가는 사진처럼 툭툭 보여주는 것이 원작 소설의 매력”이라며 “이 원작을 극장이란 3차원의 공간에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구성과 장면을 다듬어 무대에 올렸다”고 말했다.
일상의 공간에 입힌 연극적 상상력
공연은 한 관객이 남긴 후기처럼 ‘상상력의 향연’을 방불케 한다. 방의 문짝, 작은 짐수레, 수건과 샴푸 등 집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도구들이 소품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배우들은 공연 중간 부엌문을 전동 드라이버로 떼어내고 붙이며 또 다른 공간을 빚어내고, 부엌과 화장실 문을 여닫는 것만으로 무대 위에 새로운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스태프 없이 배우들이 직접 스위치를 눌러 주조명인 거실등을 껐다 켜고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조명과 음악 모두 소박하지만, 오히려 이 소박함이 공연 내내 독특한 판타지와 해학을 만들어낸다. 윤 연출은 “보통 새로운 작품을 할 때는 무대도 새로 만들지만, 이번 공연에선 공간 그 자체와 기존 물건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상상력을 더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관객의 시점을 활용해 연극적 재미를 구현한 점도 인상적이다. 수직으로 세운 합판을 둘러싸고 배우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관객이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착시 효과를 주거나, 방문에 기대 선 배우들이 마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장면을 연출한다. 일인 다역을 맡은 9명의 배우들은 하땅세 특유의 놀이성과 변화무쌍한 연기로 이 비좁은 무대를 100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는 시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윤 연출은 “배우들과 공동 창작으로 모든 장면을 만든다”고 말했다. “저희 팀의 철학이 있다면, 배우가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부터 기획, 티켓 등 극단 전반의 일까지 모든 것을 알고 함께 만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연출이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웃음). 이 공간도 타일 한 장부터 화단까지 배우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요. 공연장이 주택가에 있다 보니,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소음을 체크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부터 동네 골목 쓸기까지 문숙경 대표를 비롯해 단원들이 다 같이 하고 있죠. 적은 수의 관객만 모실 수 있는 공연이지만, 이 작품을 할 때 단원들이 특히 즐거워해요.”
15년차 극단의 꿈···“하루종일 공연 열리는 열린 극장 꿈꿔”
이 공연에서 무대의 문턱은 높지 않다. 공연이 끝나도 배우들은 “안쪽까지 천천히 둘러보시라”며 관객들에게 무대 곳곳을 소개해주고, 관객이 돌아갈 땐 맡겨둔 신발을 내어주며 군고구마나 대추 등 간단한 간식거리도 들려 보낸다.
관객들의 입소문을 탄 공연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 공연예매 사이트에선 작품에 대한 호평과 함께 10점 만점에 9.9점이라는 높은 평점을 받았다. 윤 연출은 “홍보 비용이 비싸 공연 홍보를 많이 못했는데도, 관객분들의 리뷰와 후기 덕분에 연극이 많이 알려졌다”면서 “1부 공연처럼 2부 역시 오픈런 형식으로 이어가거나, 내년쯤 1·2부를 연속해서 볼 수 있도록 같이 공연하는 방식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2008년 ‘하늘부터 땅끝까지 세게 간다’는 창작자들의 젊은 정신으로 창단한 하땅세는 어느덧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세상을 살핀다’는 의미로 전환하는 15년차 중견 극단이 됐다. 창단 초기 선보인 아동극들은 아비뇽페스티벌을 비롯해 국제 무대의 초청이 잇따랐고, <위대한 놀이>(2016), <그때, 변홍례>(2018), 총성 한 발 없이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담은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2020)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으며 극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하땅세는 최근 성북구 한성대입구역 인근에 60석 규모의 극단 전용 소극장인 ‘하땅세 극장’을 개관했다. 윤시중 연출은 “극단의 정말 소중한 공간”이라며 “이곳을 언제 찾든 늘 공연과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가꾸고 싶은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오전과 낮에는 아동극을 하고, 저녁에는 성인극, 밤에는 심야 연극도 하고요. 언제나 공연을 하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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