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튀는 사료의 다툼, 거기서 디테일 나오죠”
정의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나 공식 기록에서는 잊힌 독립운동가가 많다. 거물급 인사가 아니어서, 사회주의운동가여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해서 기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적잖다.
드디어 밝혀진 5년4개월 연재의 비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이들을 오롯이 드러내고 기록하는 ‘사회주의가 중심이 되는 독립운동사’를 썼다. 옛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소의 관련 자료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을 비교하고 당시 보고서와 신문 기사, 일기 등을 뒤지며 ‘무명의 헌신’을 한 독립운동가를 형상화해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자였다. 독립운동가 본인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내, 자식 등 가족이 겪은 고통도 담았다. 일제에 동료를 팔아 돈을 번 ‘밀정’, 그래놓고도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며 천수를 누린 부역자도 연구했다. 독립운동가가 겪은 비극뿐 아니라, 부역자의 희극도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5년4개월째 임 교수는 이들의 이야기를 3주마다 <한겨레21>에 연재하고 있다. ‘역사극장’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는 이 칼럼을 묶은 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독립운동 열전>(푸른역사 펴냄)이다.
2022년 10월24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임경석 교수와 <한겨레21> 독자들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8월24일 ‘비건 비긴’ 통권호를 읽은 독자들과의 만남 자리 이후 두 달 만에 다시 열린 독자 행사였다. 장동석 출판평론가(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가 행사 진행을 맡았다. <한겨레21>에 ‘역사 속 공간’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던 김규원 선임기자와 역사책 서평을 쓰는 대학원생 유찬근씨가 함께 무대에 올라 대화를 나눴다.
“사회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은 기존 독립운동 역사에서 완벽하게 배제돼 있습니다. 연구자로서 미안함과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중심이 되는 독립운동사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것이죠.” 임 교수가 밝힌 ‘역사극장’ 집필 이유다.
<독립운동 열전>은 모두 72개의 크고 작은 독립된 이야기가 모인 ‘옴니버스’ 형식의 책이다. 모든 이야기에서 사회주의와 관련한 꼭지가 70% 정도다. 임 교수는 독립운동에 사회주의가 끼친 영향력과 공로도 그와 비슷하리라고 봤다. “사회주의가 독립운동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은 부족합니다. 1930~1940년대에 이르면 독립운동이 곧 사회주의와 등치되는 경향마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김립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3주마다 200자 원고지 27~30장 분량의 원고를 어김없이 5년 넘게 연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장동석 출판평론가가 물었다. 임 교수는 “날마다 사료를 보고 인상적인 건 넘어가지 않고 컴퓨터의 노트(파일)에 메모한다. ‘역사극장’을 쓰려고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이 일을 한 지 40년이 넘었다. 이전부터 쌓아온 ‘보물창고’(사료 노트)에서 소재를 빼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평론가가 “비결을 너무 쉽게 이야기한 것 같다”고 하자, 독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역사극장’ 칼럼과 <독립운동 열전> 책에는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는 세부적인 묘사와 이야기가 가득하다. 장 평론가가 “살짝 지어낸 팩션은 없느냐”고 물었으나, 임 교수는 단호했다. “독단적으로 근거 없이 쓰인 곳은 단 한 군데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근대사의 사료는 중첩적이다. 한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산된 사료가 다툰다. 그래서 임 교수는 일본 경찰이나 재판부의 판결,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자료, 신문과 잡지, 편지나 일기 등을 모두 모아 해석한다. 자료를 충돌시키면 “바르르 불꽃이 튄다”고 임 교수는 설명했다.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 가운데 임 교수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이야기가 있다. 김립 암살 사건이다. 김규원 선임기자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임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김립을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김립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제갈량. 김립이 나서면 조직이 만들어지고 활력이 생기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데 굉장한 비극이 있습니다. 아직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립은 1922년 2월8일 수요일 중국 상하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총탄이 비 오듯 했다”고 한다. 그는 소련 정부가 무상으로 건넨 독립운동 자금 가운데 금화 40만루블(현재가치 400억원)을 사적으로 가로챘다는 횡령죄를 뒤집어썼다.
임 교수가 밝힌 진실은 김립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소련은 임시정부가 아닌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독립자금을 줬다. 코민테른 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사료에 따르면, 이 자금이 사적으로 쓰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김립은 공금횡령범으로 낙인찍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백범 김구가 “공금횡령범 김립은 (중략)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하였다”(<백범일지>)고 적었기 때문이다.
유찬근씨가 “공공선을 위해 희생하고 파멸되는 삶도 가치 있는 삶이라고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임 교수는 “오늘날과 같은 비혁명 시기에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말은 아주 소수의 자각된 사람에게만 통하는 이야기”라고 답했다. 지금은 누구도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이들을 쓰고 읽고 기억하는 일. 그 일을 위해 임 교수는 오늘도 꾸준히 글을 쓴다.
“삶의 자양분이 될 듯”
이날 독자 이재현(23)씨는 직접 임 교수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북토크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서양사를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미래의 꿈이 사회단체나 노동운동 활동가다. “운동사는 통상 단체, 인물, 활동의 나열로 끝나기 쉬운데 (임 교수의 칼럼은 사람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 좋아요.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지점이 생기고요. (북토크를 듣고 나니) 앞으로의 삶에 자양분이 될 것 같습니다.”
글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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