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뮤어트레일] 복음 같은 시에라 풍경...천국을 선물 받다
캐시드럴호수~선라이즈 초원~요세미티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이라면 무엇일까. 직립보행일 것이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 하지만 이제 잘 걷지 않는다. 탈것이라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축지법과 편리함을 주었다. 그래서 두 다리로 걷는 즐거움을 앗아갔다.
예외도 있는 법. 걷는 기쁨을 기억하는 몸은 언제나 길을 찾아 떠난다. 해마다 풍찬노숙을 하며 존 뮤어 트레일JMT을 걷고 있는 우리 역시 그러한 부류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의 도나휴 고개(3,372m)를 넘고, 캐시드럴호수에서 4박째 야영을 했다.
배낭을 멘 채 종일 걸어 지치는 시간임에도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놀라운 풍경들. 존 뮤어 선생은 말했다. "시에라산맥은 복음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 아무런 대가도, 돈도 요구하지 않는 길. 이것은 우리가 공짜로 받은 천국이다"라고. 천국 닮은 캐시드럴호수 곁 야영 역시 한 폭의 수채화였으나 신 새벽 서둘러 철수했다. 가미카제를 흉내 내는 모기들의 공습 때문.
JMT에서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큰 일 보는 시간이다. 먹으면 내보내야 하니까. 하루 한 번 행하는 향기롭지 않은 작업은 즐겁다. 고르고 골라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고 쭈그려 앉는 기분. 늘 야영지 부근에서 그런 경치를 찾았다. 그러나 캐시드럴호수에서는 달랐다. 한국 맛이라는 특식 때문인지 미국 모기는 정말 사생결단이었다.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쭈그린 채 모기에게 파티를 열어 줄 수는 없는 일. 별난 맛보기에 모기들이 신났다. JMT 모기는 모범공무원처럼 출퇴근이 확실하다. 그걸 경험으로 알았고, 찾아 본 자료에도 그랬다. 변온동물 모기가 움직이는 적정 기온은 27℃ 안팎. 15℃ 이하에서는 잘 움직이지 못한다. 13℃ 아래로 기온이 내려가면 아예 흡혈도 못 한다.
그러므로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속담은 옳다. 그게 JMT 모기 출퇴근의 비밀이다. 물이 없으면 모기도 없기에 캐시드럴 패스에 올라섰다. 질펀한 고원에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넓은 초원과 바위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뤄 눈目천국을 만들었다. 초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그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거기엔 산이 아니라, 한문漢文이 서 있었다. 저 산은 누가 봐도 상형문자인 한문 '산山'자였다. 지도를 보니 에코 피크Echo Peak(3,275m)였다. 참 절묘하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혼자 키득대며 소나무 숲을 가로질렀다.
엄지척처럼 솟은 바위산 컬럼비아 핑거 봉을 만났다. 원주민이 떼거리로 살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 손가락 봉. 거기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햇살이 따갑다. 선라이즈Sun Rise 초원이 가까워지며 문득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이곳을 걸었을 때, 과연 그때의 감동이 온전히 되살아날까?
화석이 되어도 좋을 감동
2006년에 내가 쓴 책 <걷는 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에서 나는 선라이즈 초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앞에 퍼지는 장엄한 경관을 바라보면서 하늘과 땅 사이 혼자 있는 자신을 의식했을 때, 그저 이 자리에서 선 채로 화석이 되어도 좋을 감동을 경험했다'고.
다큐 영상을 초대형 아이맥스 극장에서 보면 더 감동적이다. 그보다 수만 배 더 넓은 풍경에 압도당하는 건 행복한 일이고. 드디어 선라이즈 초원으로 내려섰다. 드넓은 초원과 그 풀밭을 에워싼 화강암 바위산들. 콜럼버스 손가락 닮은 침봉이 배경처럼 파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역시 멋진 풍경은 틀림 없었으나 무언가 허전하다. 일행들은 기막힌 곳이라고 하지만 무엇인가 빠졌다.
금방 그걸 알았다. 그건 초원을 흐르던 개울이었다. 사행을 이루며 고요히 흐르던 개울가에는 창포 닮은 수초가 무성했다. 가뭄 탓에 개울은 건천이 되었고 수초 역시 사라졌다. 그러니 산수화山水畵에서 '수'가 빠진 상황. 무릇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선라이즈 초원에는 캠핑장이 있다. '하이 시에라 캠프'라고도 불리는 캠핑장을 둘러 본 후 길을 재촉했다. 초원이 끝나는 언덕에서 한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려서면 이 눈 시린 풍경은 뒤로 숨을 것이다. 지구별에는 수많은 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JMT는 특별한 길이다. 먹고 잘 장비를 멘 채, 천천히 두 발로 직접 밟아 가야 가치를 알 수 있는 종주길. 출발과 도착보다는, 트레일 중간에 존재하는 게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 오름길은 거의 없고 편안한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목적지 요세미티 하늘이 예사롭지 않다. 여기 하늘은 군청색 심연처럼 맑은데 요세미티 쪽은 뿌옇다. 바람결에 나무 재도 간간이 날렸다.
광활한 와이드 풍경을 뒤로 밀어내며 걷다 보면 느끼는 게 있다.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중심이 아닌 자연이 주연인 이곳에서, 지금 걷고 있음에 감사하다는 유익한 각성. JMT는 걷는 자들에게 최적화된 조건을 주고 있다. 사막성 기후라지만 고도가 높으니 선선한 날씨다. 그리고 습기가 없어 땀도 많이 흐르지 않는다.
인위적인 건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생生 날것의 자연. 사람은 물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JMT는 호수와 시냇물을 따르는 '물의 길'이기도 하다. 아무곳에나 텐트를 쳐도 평생 꿈꾸던 최상의 캠프사이트. 거기에 보너스로 송진향 짙은 모닥불 중독도 따른다.
저 고개를 올라서면 요세미티계곡과 여태 숨어 있었던 하프돔이 보일 것이다. 오랜 내 기억 속엔 그 풍경도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점점 연기 냄새가 짙어지기 시작한다. 고개 위에 올라섰다. 요세미티계곡 전체가 옅은 연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걸 바라보며 대원 한 명이 지나가듯 말한다. "또 시작했군요."
3년간 서울 면적 45배가 잿더미로
그 말뜻을 안다. 대형 산불이 캘리포니아에서는 연례행사처럼 있어 왔다. 이곳 산불은 작은 규모가 아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씨는, 걷는 자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건조한 기온에서 산의 나무들이 딱 타기 좋은 장작 비슷한 상태가 된다. 일단 불이 붙으면 수습이 불가능한 속도로 퍼진다. 소방대가 불을 끄는 속도가 릴레이 이어달리기라면, 불이 옮겨 가는 속도는 100m 질주처럼 훨씬 빠르다.
요세미티 하프돔이 보인다. 원래 이곳에서는 안 보이는 위치였다. 산불이 거대한 나무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시야가 트였다. 거대한 화강암봉인 하프돔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도 개미처럼 보인다. 그걸 보며 산불로 아직 요세미티국립공원 입산이 막힌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2년 전, JMT를 걸을 때 이곳에서 난 산불 때문에 우리는 종주를 포기했었다. 그때 산불이 휩쓸고 간 증거처럼 새까맣게 탄 채 서있는 '검은 숲'을 지나간다. 나무들 공동묘지가 한없이 넓고 길다. 어쩐지 으스스하다. 수백 년 혹은 1,000년 이상 저 스스로 커온, 자연 속 나무숲은 이렇게 사라졌다.
미국 산림청은, 연례행사 산불도 자연이라는 기본철학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핑계처럼 들렸는데 이젠 그 진정성을 믿는다. 까만 나무 곁에서 그 증거를 본다. 나무의 새끼가 자라고 있다. 연초록 희망의 씨앗이 크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윤회를 거듭하는 자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캘리포니아에서만 지난 3년 동안 서울 면적의 45배가 불에 탔다. 그리고도 매년 더 큰 연례행사를 치르고 있는 미국은 과연 넓다.
하프돔 갈림길을 만났다. 예전엔 하프돔 등반은 무료였다. 그러나 이제는 퍼밋을 받아야 오를 수 있다. 하루 300명만 허가를 주는 탓에 그거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그 별따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벼운 배낭을 멘 하이커들이니까. 여태 JMT에서는 사람이 그리웠으나, 하산할수록 관광객들을 많이 만나 힘들 게 분명하다.
물 폭탄 요세미티의 폭포들
그리웠던 머세드강을 만났다. 강가 리틀 요세미티 캠프장이 마지막 잠자리가 될 터. 맑은 강물에서 수영을 하니 세상은 살 만하고 지금이 행복했다. 내일이면 산행이 끝난다. 식량을 탈탈 털어 죄다 뱃속에 넣어 버렸다.
내려오는 길 처음에 만난 네바다폭포는 두 얼굴을 가졌다. 소리 없이 고요히 흐르던 머세드 강물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네바다폭포. 물 폭탄과 물기둥으로 돌변한 폭포는 엄청난 소음을 만든다. 바람에 날리는 물보라에 옷이 젖는다는 지름길 '미스트 트레일'로 들어섰다.
폭포 전체가 보인다. 강물이 병목처럼 깎인 암반에 모아져 한꺼번에 낙하하는 장관. 이런 풍경에 수십 년래 가장 심한 가뭄이라는 보도가 거짓말같이 느껴진다. 네바다폭포 아래 암반을 따라 내려가 '에메랄드 수영장'을 만난다. 하얀 화강암 천연 수영장은 크고도 아름답지만 '수영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욕심이 났으나 벌금 낼 용기가 없다.
조금 더 내려서면 '영혼을 적시는 폭포'라는 이름의 버넬폭포가 있다. 이곳 역시 강물이 모두 모여 자유낙하를 한다. 폭포가 직선으로 떨어지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선명했다.
시에라산맥이 사막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물의 산맥'이라 불릴 만큼 많은 호수와 강, 폭포를 이 산이 품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어 하는 꿈의 길 JMT. 오랜만에 만난 포장길이 존 뮤어 트레일이 끝났음을 알려 준다.
몸이 기억하는 걷기의 기쁨을 누리려 우리는 이 길을 걸었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피 아일Happy Isles' 표지판에 도착해 2022년 JMT 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우리 모두 행복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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