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에 빠졌어요] "산에서 음식 나눠 주는 한국 아재들, 베리 나이스"
"혼자 등산해도 산에서 만난 아저씨 아줌마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밥 먹을 수 있어요. 미국에서는 이런 좋은 느낌 가질 수 없습니다. 순천 산사랑산악회에 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밥을 잘 준비해와서 산에서 같이 먹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K팝이나 K드라마에는 관심 없다. 오로지 K마운틴에 대한 열정으로 2년 만에 100대 명산을 완등했다. 이제는 주말마다 전국을 다니며 백두대간을 오른다. 올해 나이 26세, 미국인 여성 오로라 크롬Aurora Krom씨다(@adventurous.aurora).
푸른 눈의 처자가 이역만리 타지에서 산에 빠지게 된 건 'K-아저씨' 때문이다. 홀로 떠난 지리산 종주에서 한국 아저씨들의 인심에 반해 등산에 재미를 붙였다.
"아주 힘들었지만 지리산 산행 후에 한국 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피소에서 아주 많은 좋은 아저씨들과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아저씨들이 음식도 많이 줘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한국어 배우며 알게 된 설악의 아름다움
오로라씨의 고향은 미국 플로리다이다. 푸른 바다와 비키니, 디즈니 월드가 떠오르는 플로리다는 산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로리다는 산이 하나도 없을 만큼 아주 평평한 곳"이다. 등산과 거리가 먼 삶이었고 산을 가본 적도 별로 없었다.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미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갈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15곳 있었는데 그중 한국만 안 가봤기 때문이다. 올해로 한국생활 4년차인 오로라씨는 정부초청장학제도에 선발되어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환경생태공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등산을 제대로 해본 적 없었지만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설악산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할 때 교재에서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설명하는 예제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책으로 접한 미지의 세계는 그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를 남겼다.
설악이 지핀 꿈은 그를 산으로 향하게 했다. 첫 번째 산행은 도봉산이었다. 이후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처럼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설악산은 너무 좋아서 여섯 번이나 갔다. 많은 산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리산 '화대종주'다. 화대종주는 지리산 화엄사와 대원사를 연결하는 약 50km 길이의 종주코스다.
함께 종주를 가겠다고 나서는 친구가 없어 홀로 떠났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도 매력적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선의가 그를 산에 더 깊이 빠져들게 했다. 대피소에서 만난 아저씨들은 말도 안 통하는 오로라씨를 친절하게 대해줬고 음식도 나누어줬다.
순천에서 지낼 때는 산에서 만난 한 아저씨와 친해져 그가 소속되어 있던 순천 산사랑산악회에 가입해 함께 활동했다. 오로라씨는 친절하고 상냥한 아저씨들과 함께 산에 다니는 게 좋았다.
100대 명산 이어 백두대간 도전
오로라씨가 100대 명산에 도전하게 된 건 함께 산을 다니던 친구들 때문이다. 친구들 과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해서 친구들보다 더 빨리 끝내고 싶었다"는 그는 2020년 9월 23일에 시작해서 2022년 8월 21일 도봉산에서 도전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 대상지를 도봉산으로 정한 이유는 그가 한국에 와서 처음 오른 산이기 때문이다. 더 빨리 완등을 끝낼 수 있었지만 엄마와 함께 산을 오르고 싶어 3개월을 기다렸다. 마지막 산행에는 친구들이 함께해 그의 완등을 축하했다.
오로라씨의 이력은 화려하다. 100대 명산을 완등하고 난 뒤 현재 백두대간에 도전 중이다. 국립공원공단 국제협력 서포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트레일러닝 모임도 병행 중이다. 울트라마라토너 심재덕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아 트레일러닝 대회에도 출전했다.
'100대 명산 완등, 지리산 화대종주 3차례, 설악산 종주 3차례, 그외 등산 경력 다수.'
그런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산행은 지난 5월 참가한 거제지맥 50k 트레일러닝 대회다. 피부 마찰로 피가 나고 다리에 근육경련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린 끝에 50km의 산길을 10시간에 걸쳐 완주했다.
"한국에는 등산 초보가 쉽게 갈 수 있는 산이 많습니다.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갈 수 있어서 좋기도 합니다."
오로라씨는 "한국 산은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아기자기하다"고 말한다. 등산로가 잘 가꾸어져 있고 자가용 없이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쉽게 산에 갈 수 있다는 것. 미국에 비하면 산에 위험한 육식성 동물도 드물어 잡아먹힐 걱정도 없다.
월악산은 꿩 샤브샤브가 별미
그가 한국산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 지역의 특별한 음식과 막걸리 때문이다.
"월악산은 전망이 특별할 뿐만 아니라 월악산과 가까운 수안보는 버섯전골과 꿩 샤브샤브 등 맛있는 음식들로 유명합니다. 이제 산 생각하면 항상 음식이 같이 떠올라요."
월악산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그곳의 음식에 감탄한 나머지 월악산을 세 번이나 갔다. 가장 가보고 싶은 산으로는 통영 사량도 지리산을 꼽았는데, 그 이유를 묻자 "해물…"이라는 수줍은 대답이 돌아온다.
처음 한국에서 산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등산 문화도 있다.
"한국 산에서는 먹걸리나 소주를 마시는 아저씨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위험성 때문에 등산하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산에 가면 모르는 아저씨들이 술을 따라 주고 같이 마시기도 했다. 처음 이 광경을 봤을 때는 이런 문화가 낯설고 신기했다. 한국 사람들은 산에서 술도 나눠 마시고 밥도 나눠먹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서양인의 눈에는 함께 밥을 나눠 먹는 문화가 정감 있어 보였다. 한국인의 '정'에 끌려 등산 마니아가 된 미국인 오로라 크롬씨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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