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EU 주도 세계평화 ‘흔들’ … 포퓰리즘 · 극우주의 ‘득세’
■ 창간 31주년 특집
- 리더십 없는 리더시대 (2) 저무는 ‘팍스 아메리카나’
사라진 ‘세계 경찰’
바이든 민주주의 가치 외쳤지만
아프간 철수 · 우크라 소극 개입
지지율 겨냥한 ‘모순적 행보’ 만
무너진 ‘유러피언 드림’
영, 경제위기 속 잇단 총리교체
프 · 독, 러 가스중단에 관계악화
이탈리아 100년만에 극우총리 나와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 평화)’가 저물고 있다. 1987년 영국 학자인 폴 케네디 미 예일대 교수가 저서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미국의 쇠락을 예언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당시 수많은 학자는 “케네디 교수는 미국 쇠퇴론자”라고 비판하며 미국의 패권국 지위가 공고할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우크라이나 전쟁 간접 관여 등으로 대표되는 ‘자국 우선주의’ 기조는 “‘세계의 경찰’인 미국이 사라졌다”는 회의론을 낳고 있다.
민주주의의 등대와도 같았던 유럽연합(EU)도 흔들리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 이후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하더니,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에 이렇다 할 뾰족한 대책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 해결보다는 극우·포퓰리즘으로 국내 표심만 챙기는 세력이 ‘대항 리더십’으로 득세하는 형국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질서, 민주주의적 가치 유지에 사활을 걸던 ‘트랜스애틀랜틱’ 리더십이 동시 붕괴 위기에 놓였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 사태 향방에 따라 세계 정치 지형이 크게 재편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세계의 경찰’, 미국의 실종=“미국이 돌아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후 ‘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치’를 주제로 연설하며 이같이 외쳤다. 권위주의 국가들과 맞서 싸우고, 동맹과 민주주의 가치 견인에 외교정책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취지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골머리를 앓던 이들은 환영했지만, 박수 소리는 6개월여 만인 그해 8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결정과 함께 멈췄다. 아프간 철군은 단순한 ‘미군 철수’ 문제가 아니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민주주의 공격 세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패권국으로서의 경고를 스스로 거둬들인 셈이란 것이다. 그 외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재정 지원 외 적극 관여를 삼가고, 미국 기업을 우선시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시행하는 등 ‘언행 불일치 리더십’이 계속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30%대까지 떨어진 지지율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외교보다는 고령 논란, 경제위기 책임론 등으로 국내 성난 민심을 다독이는 데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재선은커녕 당장 오는 8일 중간선거 결과도 미지수다. 바이든 대통령의 상대도 성숙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게다가 지난해 1·6 의회 난입 사태 이후 미국 내부에서의 민주주의 동력도 떨어졌다. 냉전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위기를 넘긴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향후 수년 동안은 보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무너지는 ‘유러피언 드림’, 극우 물결의 등장=세계적인 석학 제러미 리프킨은 2004년 그의 저서를 통해 공동체와 연대에 초점을 맞춘 EU의 ‘유러피언 드림’이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개인과 미국의 패권에 기댄 아메리칸 드림은 끝이 정해진 드라마란 취지다. 하지만 2020년, EU ‘빅 3’(영국·프랑스·독일) 중 영국이 EU를 탈퇴하며 유러피언 드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때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갈팡질팡 행보에 “대체 어느 편이냐”는 비판을 받는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사를 자처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핵무기를 써도 프랑스의 핵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라 발언해 뭇매를 맞았다. 국내적으로도 연금개혁안을 놓고 반정부 시위대의 압박에 부딪힌 상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무(無) 존재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후 가장 인기 없는 독일 총리라는 오명도 얻었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일로다. 지난달 26일 양국 정상은 업무 오찬을 했지만, 두 정상은 공동 성명조차 내지 않았다. 빅 3에서 균형자(balancer) 역할을 하던 영국은 총리조차 수차례 갈아치우며 내부 리더십 위기에 처한 상태다. EU를 유지할 지도자가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리더십 부재 속에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포퓰리즘 세력이 중앙 정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EU 국가이면서도 러시아 제재에 반대하는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에 이어 이탈리아에서는 지난달 말 극우 정당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다. 1922년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의 극우 지도자다. 지난 9월 스웨덴에서도 네오나치에 뿌리를 둔 극우 스웨덴 민주당이 제2당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지난 6월 총선에서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이 우파 간판 정당 지위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종료 이후 서방 세력에 대규모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유럽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CER) 이언 본드 외교정책국장과 루이지 스카지에리 선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 안보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 회원국들이 서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멜라니 졸리 캐나다 외교장관도 9월 제77차 유엔총회에서 “오늘날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유엔, 더 많은 다자주의가 필요하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현아 기자 kimhah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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