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2. 11. 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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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용의자가 범죄 심리학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직접 접촉을 시도한다는 내용의 소설 초고를 다시 꺼냈다. 초고는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의 사진집 『사랑의 방』 가운데 자신이 방에 불을 지른 뒤 찍은 사진 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2003년 작성된 것이었다. 이 초고를 토대로 이전에도 작품을 써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대신 초고와 상관없는, 동욱이라는 청소년 방화범을 그린 단편소설 「동욱」이 나오긴 했지만.

올해 초,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쓰기 전 단계의 각종 메모나 글이 담긴 컴퓨터 폴더에서 다시 이 초고를 꺼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은 지극히 평범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건 다 틀렸어, 라고 범죄 심리학자와 경찰의 눈을 속이고 빠져나가는 영리한 범죄자를 그린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써나가던 어느 순간 용의자가 갑자기 이상하고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정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겠어요?

원래는 동조하는 척하면서 얻을 건 얻고 줄 것은 주면서 범죄 심리학자와 게임하는 듯한 설정이었는데,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이 담긴 것이겠지만, 용의자가 갑자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초 설정과 달라지면서 소설은 중간쯤에서 막혔다. 이거, 좀 이상한 쪽으로 가는데. 스스로 용의자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감 시간이 다가왔지만 마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이때 마감을 정상적으로 할 것으로 상정하고 오래 전에 친구와 잡아놓은 약속 날자가 다가왔다. 에라, 모르겠다.
지난 봄, 그는 마감을 앞뒀지만 친구와 약속대로 일단 제주도를 날아갔다. 곧 재일교포 출신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1937~2011)이 설계 건축한 ‘수풍석(水風石) 뮤지엄’을 찾았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겉모습은 그냥 집이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바람의 박물관. 안에 들어가 있어도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논리의 파괴, 비논리의 논리.... 그는 비로소 소설의 결론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올해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으로 뽑힌 문제적 단편 「진주의 결말」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걸어 나왔다.

「진주의 결말」은 범죄 심리학자인 ‘나’가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에 불까지 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유력한 용의자 진주로부터 이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나는 삼십대 후반의 독신 여성 진주와 객관적 사실을 두고 팽팽한 해석과 논리 대결을 벌이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두고 첨예하게 맞선다. 숨진 아버지가 간암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살인 혐의가 벗겨지고 방화 혐의만 확정된 가운데, 진주는 사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어떤 결말은 변함없다면, 미래를 상상해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달이 있는 방향으로 더듬거리더라도 한 발짝씩 걸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78-79쪽)

소설가 김연수가 문제작 「진주의 결말」을 포함해 여섯 번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2014년 쓴 두 작품에 코로나 이후 풍경이 담긴 6편을 더해서 모두 8편이 담겼는데, 무려 9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다. 등단 이래 2~4년 간격으로 작품집을 발표, ‘다산의 작가’로 불려온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랫동안 단편소설을 쓰지 않았다. 쓰고 싶은 게 없을 때는 쓸 수 없다. 그러다가 2020년이 되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고 나자 뭔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9년 만에 다시 들고 온 소설집에서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하여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달 26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진주의 결말」을 통해서 독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나.

“작가인 저 자신도 처음 진주의 결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웃음) 어떤 독자분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 자신이 진주라고 농담하면서 진주를 좋아한다고 말하더라. 답장을 보내면서 진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할 때에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지만, 남에게 이해 받으려면 이유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 이유라는 게 바로 이야기라는 걸. 타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설명하면 이해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상태는 똑같은데도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에 따라서 이해와 불가해가 나뉜다는 것은 진정한 이해가 아니고 그냥 이야기만 이해할 뿐이다. 진주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제가 왜 그렇게 썼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팬데믹이나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보니 모든 일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이고 이해가 불가능하더라. 그렇다면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고, 여기에서 소설가로서 할 일이 있겠구나고 생각했다.”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종말론이 득세하던 1999년 여름 동반 자살을 결심한 스물두 살의 두 대학생 ‘나’와 ‘지민’이 시간 여행을 다룬 책 『재와 먼지』를 접한 뒤 의외의 선택을 하는 작품이다. 소설 속의 『재와 먼지』은 주인공들이 사랑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선택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 번째 삶을 살게 되고, 다시 가슴 뛰는 미래를 안고서 처음 만나는 시점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세 번째 삶을 살아간다는 줄거리로,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깨닫게 한다는 내용. 출간 금지된 책 『재와 먼지』의 줄거리를 전해준 외삼촌은 동반자살을 꿈꾸는 두 사람에게 말한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29쪽)

―이 소설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여러 모티브가 들어있다. 컴퓨터 폴더 안에 있던 메모와 초고들인데, 교보문고에서 갔던 사람이 영매가 돼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메모와, 도박꾼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도박을 할 때 다섯 번 내리 한 쪽이 질 경우 여섯 번째부터 진 쪽을 계속 선택하면 결국 이기게 된다는 글과, 시간 여행과 사고 실험을 하는 소설 『재와 먼지』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나’와 ‘지민’ 이라는 인물은) 처음엔 교보문고에서 뭔가 떨어져서 신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장면에 남자밖에 없었는데, 글을 쓰면서 사건에 맞게 캐릭터들이 나온 것 같다. 소설을 쓸 때 미리 계획과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쓰는 게 아니라, 약간 막연한 이야기 혹은 어떤 장면을 가지고 쓴다. 쓰고 여러 번 반복해서 고치다보면 서서히 인물이 나오게 된다. 아이디어만 있는 것이고, 이야기는 실제로 써봐야지 안다.”

―소설 속 책 『재와 먼지』에는 시간을 과거로, 미래로 시간 여행하는 내용이 담겼는데.

“그냥 아이디어 차원에서 마치 임사체험처럼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미래가 정해져 있고 이것을 알고 있다면, 현재 행동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의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하는 게 일반적인데,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면 결국 지금 아무것도 않게 된다. 팬데믹 이전의 상황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된다면,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행동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저의 오래된 고민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정약용이나 시인 백석 등처럼 자신의 계획된 삶이 모두 끝나버린 ‘사점’을 지나서도 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내는 것일까, 이 사람들이 두 번째 삶을 살아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게 저의 오래된 고민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상상하고 비로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을 깨달았다.”
작품 「다시, 2100년의 바르바르에게」는 출판사에 다니는 ‘나’가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가 병세가 악화한 상태에서 ‘바르바라’라는 세례명을 반복한다는 것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할아버지의 녹취 원고를 살피다가 바르바라가 1949년 북한 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죽은 막내 여동생이라는 것을, 그 여동생이 동정을 지키기 위해 병까지 마다하지 않는 1850년 죽은 또다른 바르바라와 연결된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고통 이후의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하여 여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인물과 마주치지만 미래를 생각하고 안간힘을 써서 참아내는 할아버지를 대면하게 되는데.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231쪽)

―다소 복잡한 줄거리다.

“백석 이야기를 담은 2020년 장편 『일곱해의 마지막』을 쓰면서 원산에 있던 덕원성당을 알게 됐다. 덕원성당 생존자 가운데 일부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일부는 사제가 됐는데, 환속한 분도 있었다. 환속해 철학 교수가 돼서 루이 라벨을 번역한 분이 소설의 모델이다. 여기에 1994년 풀려난 북한의 정치보위부 출신 미전향 장기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 최양업 신부가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세례명 바르바라와 그와 관련된 상상이 더해져 나왔다. 할아버지가 자기 여동생을 죽인 사람의 옆자리에 앉는다는 설정 등은 모두 허구이고 상상이다. 과거에도 바르바라라는 세례명을 썼지만, 22세기가 되어도 새 바르바라가 나올 것인데, 뒤에 올 바르바라를 생각하면 자신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을 견디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세월호 참사와 연결해 누군가를 간절히 기억하는 것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다. ‘나’는 옛 연인 ‘희진’에게 희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우연의 연쇄 이야기가 담긴 메일을 받게 된다. 희진의 메일에 따르면, 희진은 일본에서 공연을 마친 뒤 후원자인 후쿠다 준을 만나서 놀라운 사연을 전해 듣는다. 후쿠다는 10년 전 삶의 끝장났다고 절망했다가 우연히 카페에서 희진이 맡겼던 씨디의 노래를 듣고 삶의 의미를 되찾은 뒤 그녀를 오랫동안 찾아왔다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181쪽)

―이 소설에선 독자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난 뒤, 빠른 시간 안에 쉬운 이야기를 담아 가독성이 높은 작품들을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대여섯 편정도 썼다. 주로 우리가 겪은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는 소통의 무게를 뒀던 것 같다. 2014년의 시대정신은 기억하자, 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데 왜 기억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하는 의문도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으로 인해 무슨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던 것 같다. 현대사에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사고가 많이 있는데, 이런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우리는 서로 강하게 연결되는 것 같다.”

소설집에는 이밖에 아이를 잃은 은정이 어둡고 두려운 바다 앞에 서서 200년 전 그 바다를 건넌 인물 정난주를 떠올리며 손유미 소설가로 재탄생한 이야기를 그린 「난주의 바다 앞에서」, 사랑했던 여자 정미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막의 일몰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 위해 바람을 맞는 남자 ‘그’를 그린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등이 담겨 있다.

―9년 만에 나온 이번 소설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40대 때에는 약간 비관에 갇혀 있었다. 부모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고, 세월호 참사도 있었다. 삶의 내리막이 보이더라. 그래서 소설 주인공과 마찬가지 입장이 됐다. 나머지 생을 살 필요가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이때 기댄 게 백석이었다. 백석이 절필한 이유나 절망은 이해가 됐지만, 그의 장수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 여러 정황을 따져보니까 충분히 잘 쓸 수 있었지만 엉망진창으로 시를 썼고 어떤 결단을 내려서 절필한 것 같았다. 백석은 마지막 시기 북한 체제에 동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진다. 최고 시인이었음에도 짜증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시를 못썼다. 만약 백석이 찬양시를 써서 상을 받는 순간, 2020년 백석은 없었을 것이다. 백석은 미래의 자기를 떠올리면서 현재의 고통을 넘어선 듯했다. 아무 고통 없이 시는 더 안 써도 돼.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을 한 결과 현재를 바꾼 것이다. 그의 마지막 시기 삶의 동력은 사점 뒤에 다시 에너지가 생기고 일시적으로 굉장히 좋아지는 ‘세컨드 윈드’ 같은 것이었다. 팬데믹이 오면서 백석에게 알게 된 것들이 떠올라서 그걸로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미래가 현재를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 쓰게 됐다. 이번 소설집은 제가 비관의 비관까지 가본 뒤 탐색한 결과물 같은 것이다. (작품의 세계관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라는 얘긴가) 그렇지 않을까. 이전까지 소설가로서 정체성이 있긴 있었겠지만, 이제 좀 달라졌다. 쓰는 게 좋아서, 좀 잘 쓰고 싶어서 썼지만, 지금은 이야기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 좋은 이야기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모슬포의 작은 서점에서 열린 낭독회에 갔는데, 작업복을 입고 피곤하고 졸리는 표정의 독자들이 참석했더라. 그들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마치 빵이나 밥 같은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소설이 허기진 누군가한테 제공되는 정신적 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대학입시 전기에서 떨어진 이과생 김연수는 책을 좋아하니까 번역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당시 후기였던 성균관대 영문학과에 지원, 합격했다. 처음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1학년 1학기 때부터 도서관에서 붙박이로 책을 읽었다. 이때 시나 소설, 희곡, 평론 등을 읽으면서 대학 노트에 닥치는 대로 흉내 내서 썼다.

그 가운데 아무래도 시가 쉽고 자신과 잘 맞는 것 같아서 대학 노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처음 노트 한 권을 채울 때까지 형편없었지만, 두 번째 노트의 시들은 앞선 노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느낀 그는 쓰고 또 썼다. 세 번째 노트의 시는 더욱 좋아졌다. 노트에 계속 시를 쓰던 그는 대학 3학년 때 『작가세계』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됐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대학 노트에 쓰고 또 쓰던 그 시절이 작가 김연수의 원점이었다.

시 말고 다른 것도 써볼까. 다른 글쓰기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이번에는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 지인이 자신이 쓴 단편소설 「바이러스」를 읽더니 재미있다며 장편으로 늘려 써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하루 80매에서 100매를 집중적으로 쓰는 방식으로 열흘 만에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어느 날 선배 이문재 시인의 전화를 받고 북한산에 함께 올랐다가 신문을 통해 국내 대표적 장편소설상인 ‘세계문학상’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이미 써 놓은 장편소설을 세계문학상에 응모했다. 비록 당선되지 못했지만, 최종심에 오르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주위에 알려졌다. 한 지인은 장편 응모작을 버리지 말고 다른 곳에도 제출해 보라고 조언했고, 제출된 작품이 작가세계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도 등단할 수 있었다.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난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이듬해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가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차례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솥』 등을,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곱 해의 마지막』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설명해달라.

“타인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얘기를 좀 많이 썼던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가,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가에 관심이 많다. 부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부나 권력으로 곤경이나 위험을 피하지만, 부나 권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살아가는 것 같다. 힘든 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일수록 강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저는 각자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관심이 많다.”
김연수 소설가. 이제원 기자
―글쓰기의 전략이나 원칙, 방법이 있다면.

“첫째, 매일 계속 고치는 것이다. 아이디어나 쓰고 싶은 글을 아침마다 날마다 고친다.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정하고 계획에 따라서 쓰는 건 고통스럽다. 과거에는 어떤 미래를 위해서 지금 참는 식으로, 갈아 넣는 식으로 썼지만, 지금은 세계관이 바뀌어 기쁨에서 글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둘째, 자신을 잊고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의 안에만 있으면 뻔한 얘기, 나쁘게 말하면 50대 남자의 정체성만을 쓸 가능성이 높다. 계속 뻗어나가야 한다. 제 생각 속에만 있을 때는 컨디션이 좋지 않지만, 컨디션이 좋으면 풍경이나 감정 등도 소설 속으로 들어와 소설이나 문장이 바뀐다. 열린 상태에서 계속 받아들여야 된다. 이때 타인과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된다. 사회 속에서 소설을 써야 한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이야기가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해야 한다. 저는 도구일 뿐이다.”

긴 질문과 자세한 대답으로 인터뷰가 의외로 길어지면서, 그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백팩을 맨 그는 건물 1층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자, 그는 서둘러 내달리기 시작했다. 용산역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달린다는 그의 말이 피어올랐다. 긴 비관의 비관의 시간 속에서도 이른 아침마다 글을 쓰고 또 고쳤을 그의 모습도. 그리하여 새롭게 재탄생한 소설가 김연수에 대한 기대도.

청명한 하늘과 멋진 구름을 보면서, 긴 비관의 비관의 끝에서 그가 건져 올린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미래를 기억한다면 현재를 더 잘 살아낼 수 있다는 철학을.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 있다는 신앙 같은 신념을. 비관의 강을 건너자 나타난 남은 인생을 ‘세컨드 윈드’의 바람으로 달려가리라는 자기 암시와 다짐을. 하나 더, 삶의 숨겨진 외경까지. “이제 나는 확실하게 안다. 세상에는 경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경이는 의외로 단순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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