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응, 현장을 가다] 영국 시내 한복판에는 '치유의 벽'이 있다
애도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빨간 하트로 채워진 벽이 템스강을 따라 500m가량 이어졌다. 웨스트민스터 궁, 빅벤, 런던 아이 등 명소가 모여 있는 곳이다. ‘2020년 3월부터 코로나19로 사망한 동료 시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문구 아래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하나둘 모였다. 손바닥만 한 하트마다 누군가의 손글씨가 빼곡하다.
‘보고 싶은 우리 엄마 베티 타일러, 2020년 4월13일’ ‘스티븐 포트, 딱 한 번이라도 당신의 눈을 볼 수 있다면’ ‘데이비드 아서, 1954-2020, 최고의 남편이자 아빠, 할아버지’ ‘베버리 클리어, 1972년 6월16일-2021년 1월26일, 당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애덤 레인, 1988년 11월3일-2022년 1월16일, 다시 만나기까지 사랑이 우리 사이의 거리를 메울 거예요’ 등등. 코로나19로 사망한 이들의 가족과 친구가 남긴 메시지였다. 하트 한 개는 사람 한 명을 의미했다. 2021년 3월29일부터 그려진 하트는 18만 개가 넘는다.
이곳은 코로나19 희생자 추모 벽이다. ‘정의를 위한 코로나19 유가족(Covid-19 Bereaved Families for Justice UK·이하 유가족 단체)’이 주도했다. “이것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다. 그때 빠르게 대처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이 벽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2021년 3월1일 코로나19로 남편을 잃은 린 존스 씨(70)의 말이다. 유가족 단체 회원들은 매주 금요일 이 담벼락 앞에 모인다. 색이 바랜 하트를 다시 칠하고 낙서를 지우기 위해서다. 맞은편엔 영국 의회인 웨스트민스터 궁이 있다.
영국의 코로나19 사망자는 20만 7948명이다(10월16일 기준). 다른 재난과 달리 감염병 재난은 오랜 기간에 걸쳐 벌어진다. 피해 규모도 광범위한 데다 매일 집계되는 숫자 말고는 피해를 가늠할 길이 거의 없다. 빈 벽이 하트로 채워지기 전까지, 유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만약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면 유가족들은 모이기 쉬웠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주에도 영국에서 수백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 유가족 대부분은 각자 집에서 홀로 슬퍼할 뿐이다.” 유가족 단체의 또 다른 일원인 프랜 홀 씨(61)가 말했다.
그도 남편의 이름을 벽에 남겼다. ‘스티브 미드’라고 쓰인 하트였다. 11년간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2020년 9월26일 결혼했다. 2018년 미드 씨가 암을 진단받자 아내로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었다. 프랜 홀 씨는 임종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굿 퓨너럴 가이드(Good Funeral Guide)’의 대표다. 오랫동안 장례업계에서 일해온 만큼, 이별도 준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영국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2020년 가을, 영국은 또 다른 유행곡선의 시작점에 있었다. 9월21일 정부에 코로나19 대응을 조언하는 과학자문단(SAGE)은 단계적 일상회복 추진을 잠시 중단하는 비상계획 ‘서킷브레이커’를 권고했다. 2차 유행을 늦추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영국 하원이 2021년 10월12일 발표한 보고서 ‘코로나바이러스:지금까지 배운 교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서킷브레이커가 2차 봉쇄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관들은 첫 번째 파도가 잦아든 후 최악의 상황이 지나갔다는 낙관적인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방역 정책이 혼선을 빚는 사이, 10월6일 미드 씨는 코로나19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결혼식 열흘 만이었다. 홀 씨는 코로나19가 죽음의 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상 전화로 유언을 남기고, 임종 직후 시신은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빠르게 밀봉되었다. 마지막 인사만은 직접 전하고 싶었다. 프랜 홀 씨는 병원 측의 허가를 받아 페이스실드와 보호구를 착용한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을 만났다. 약을 다량 투여한 탓에 의식이 거의 없었다. 후회되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자 미드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희미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다.” 66세 생일을 하루 앞둔 10월18일 미드 씨는 세상을 떠났다. 11월5일 영국 정부는 두 번째 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홀 씨는 한동안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영국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유가족 단체를 만나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로비 아키놀라 씨(31)는 2020년 4월26일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네 번이나 111(영국 국가보건서비스 응급전화)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때마다 집에 머물면서 쉬라는 답변만 들었다. 아버지가 그때라도 병원에 찾아갔다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셨을까?” 미셸 럼볼 씨(51)의 어머니도 같은 달 숨을 거뒀다. 코로나19 증상이 발현된 지 8일 만이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떠나고 유가족으로서 도움을 구하려고 했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정부의 실책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영국 전역 6500여 명이 유가족 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각각의 사연이 정말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영국이 팬데믹 초기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차례 비판받는 지점이다. 2021년 10월 영국 하원 보고서도 ‘바이러스에 대한 운명론적 접근법’이 ‘영국에서 최악의 공중보건 실패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뿐만 아니라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2021년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가 방역 지침을 위반하고 수차례 파티를 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영국 언론이 ‘파티게이트’라 명명한 사건이다.
크리스티나 파겔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임상연구교수가 보기에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그는 독립 과학자문단(Independent SAGE)에서 활동한다. “1차 유행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실수를 했다.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다음 유행 전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철저히 복기해야 했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자 모든 사람들이 ‘이제 끝났다’고 말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한국처럼 빠른 진단·추적·격리 시스템도 없었다. 정부는 과학자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파겔 교수가 보기에 영국은 바이러스 유행을 엄격하게 통제하기보다 경제회복에 더 초점을 맞췄다.
유가족 요구로 코로나19 대응 조사 시작
유가족 단체는 정치의 책임을 묻는 최전선에 섰다. 영국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지만, 팬데믹의 상흔을 공동체가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여론도 컸다.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서 ‘코로나19가 끝났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프랜 홀 씨는 “정부는 팬데믹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떠난 이들의 이름을 템스 강변 담벼락에 직접 채우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공휴일로 지정하고 성대하게 국장을 치렀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은데도 어째서 떠난 이들을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가?” 프랜 홀 씨는 묻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애도의 공간은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끌었다. 전국에서 온 자원봉사자 1500여 명이 하트 그리기에 동참했다. 열흘 만에 하트 15만 개가 그려졌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와 종교 지도자들이 유가족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영국 하원 의원 138명은 지난해 9월 코로나19 추모 벽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지난 10월4일 영국 코로나19 대응 과정에 대한 공공 조사가 시작되었다. 유가족 단체가 이끌어낸 성과다. 영국 조사법(Inquiries Act)에 따라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거나 공공기관 업무 수행에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때 실시하는 법정 조사다. 홀 씨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실패에 대한 기록이 남아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팬데믹 기간 정부의 주요 의사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왜 아프리카계·아시아계·소수인종 등이 코로나19로 더 큰 타격을 받았는지가 주로 다뤄질 예정이다.
코로나19 추모 벽에는 사진과 꽃이 곳곳에 걸려 있다. 대체로 영어로 쓰였지만 중국어나 스페인어, 아랍어도 종종 보였다. 500m 담벼락을 따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달랐다. 미셸 럼볼 씨는 이 담벼락을 ‘치유의 벽’이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돕고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저의 상실감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코로나19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위로받을 것이다.” 9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도 유가족 단체 회원 7명이 담벼락 앞에 모였다. 하트 안에 새롭게 채워야 할 이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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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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