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어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달항아리에 생명이 피어난다”[박주연의 메타뷰](23)
2022. 11. 2. 06:40
개인전 출품작 완판…달항아리 도예가 김동준
영국의 유명한 현대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1887~1979)도 1935년 경성에서 조선의 달항아리를 구매하고 귀국하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애지중지하던 그 달항아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동준(41)의 달항아리는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가 그러했듯 대지, 흙을 연상시키는 요철이 살아 있다. 흙이 불에 구워지면서 생긴 철점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그는 현대 도예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전기나 가스가마를 거부하고 장작가마만 사용한다. 가마는 달항아리 한두 점만 구울 수 있도록 아주 작게 짓는다. 한 점 한 점에 정성을 쏟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 작가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지난 10월 20일부터 서울 신사동 갤러리LVS 본관과 종로구 부암동 응운당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 전시를 개막하기도 전에 출품작 20점이 모두 판매됐다. 상당수 컬렉터가 작품을 보지도 않고 구매했다. 현재 그의 달항아리 가격은 한 점당 1000만원을 웃돈다.
지난 19일 김동준 작가를 갤러리LVS에서 인터뷰했다.
“가마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고 시간이 흐르면 가마에 압력이 차고 온도가 올라가요. 그러면 ‘그르렁 그르렁’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죠. 마치 뜨거운 가마 안에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앉아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도 흥분상태가 되죠.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쳐요. 그렇게 가마와 온전히 교감하며 17시간 동안 혼자 불 앞을 지켜요. 잠시 가마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 때도 있어요. 그러다 마침내 ‘이때다’ 하며 불을 완전히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오죠.”
김동준 작가는 달항아리 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교감’, ‘일체감’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가마에 넣기 전 물레를 돌려 달항아리를 성형할 때도 흙과 내 몸이 일체감이 되는 찰나의 순간이 온다”며 “그때 바로 멈춰야 좋은 모양의 항아리가 된다”고 말했다.
달항아리는 높이와 몸체의 최대 지름이 거의 같다. 높이가 40㎝를 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큰항아리를 물레로 한 번에 구워 몸체, 어깨, 구연까지 성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반부와 하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다. 접합한 부분이 불에 구워지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 완전한 원형을 이루기는 어렵다. 살짝 이지러진 원형의 달항아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김 작가는 “성형한 항아리를 불에 구우면 수축해 작아지기 때문에 성형할 때 가능한 한 크고 둥근 달항아리를 지향한다”면서 “하지만 흙을 100% 컨트롤할 수 없는 데서 조형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흙을 100%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물레를 돌리다 보면 제어하기 어려워지면서 딱 멈춰야 할 순간이 느껴져요. 제가 어느 정도 생각한 그림은 있지만, 이미 그 항아리 안에 모양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예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일은 돌 속에 있는 천사, 노예 등을 빼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얘기예요. 저는 각각의 달항아리가 지닌 모습을 찾아줄 뿐이에요.”
-각각의 달항아리가 스스로 예정한 생김새가 있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재료의 핵심인 백토를 직접 구하러 다닌다고요.
“백토는 평지에는 없어요. 산맥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어요. 꼭 소고기 마블링처럼 황토와 섞여 있죠. 산을 헤매며 원하는 백토를 구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장작은 소나무인가요.
“소나무만 써요. 1년에 40~50t을 사용하죠. 아마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은 양일 거예요. 가마를 아주 작게 만들어 달항아리 한두 개만 넣어 굽기 때문에 불을 자주 때야 하거든요. 하루 17시간 불을 때고 나흘간 식혀야 하기 때문에 5일에 한 번씩 불을 때요. 남들은 큰 가마를 만들어 한꺼번에 구우라고 하지만, 그럴 경우 불량품이 많아지고 제가 원하는 작품이 안 나와요. 그래서 연료와 시간이 많이 소요돼도 작은 가마를 유지하는 거예요. 장작도 제가 직접 패요. 그런 몸을 쓰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좋은 달항아리를 빚기 위한 수행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요즘 도예가들은 전기나 가스가마를 많이 쓰는 것으로 알아요. 왜 어려운 장작가마를 고집합니까.
“예전에는 좋은 재료를 써야 달항아리가 잘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보다는 저의 의지가 달항아리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믿어요.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재료일 뿐, 세월이 쌓인 달항아리가 주는 에너지, 또 활활 타오르는 불에 몸을 맡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에 의한 질감을 표현하려면 저 역시 큰 에너지를 쓰고 집중과 열정을 다 쏟아부어야 해요.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혼이 담겨야 좋은 달항아리가 나오기 때문에 장작가마를 쓰는 거예요.”
그는 “달항아리 하나가 나오는 데 1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사람이 잉태돼 엄마의 자궁에서 영양분을 받고 성장하다 10개월 만에 세상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계절에 따른 루틴이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가을과 겨울은 건조하고 수분이 없잖아요. 이런 계절에는 나무를 자르고 흙의 수분을 빼기 좋아요. 그래서 광산에서 가져온 백토를 물에 풀어 묽게 만들고 한 번 걸러요. 그러면 쓸 수 있는 흙 외에 다 쓸려나가죠. 그런 다음 흙을 수비해 곰팡이가 안 생기도록 1년 동안 사용할 흙을 저장해요. 이때 흙을 잘못 만들면 한 해 작품을 다 망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이 시기에 장작도 패고요. 늦겨울과 봄에는 물레성형(달항아리 빚기)을 하고 늦봄부터 가을에 걸쳐 소성(불에 굽기)하면서 작품을 만들어요.”
-그야말로 작가의 지극한 정성을 받고 뜨거운 불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후 태어나는 거네요.
“달항아리를 빚고 가마에 굽기까지 소요되는 시간 동안 제게는 마음이 울컥하거나 울렁거리는 감동과 설렘이 있어요. 결과뿐 아니라 과정 또한 중요하고 예술 표현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달항아리에 집중하기 위해 그 기간에는 웬만하면 사람도 안 만나요. 또한 선한 마음가짐도 중요하다고 믿어요. 저는 상처에 덤덤한 달항아리의 모습이 좋아요. 사람도 엄마의 자궁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고통을 겪고 견디며 삶을 살아가잖아요. 저마다 조금씩 다른 조형성을 보이는 달항아리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고 믿어요.”
-같은 작가의 달항아리라도 질감, 전과 굽, 모양, 색깔 등이 조금씩 다르지요. 사람들은 김 작가의 달항아리에서 어떤 점을 특히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가정하면 호랑이라는 존재에 압도되지 줄무늬를 감상하지는 않잖아요. 바라본 순간 ‘이거 뭐지!’ 하는 느낌, 오감으로 짜릿함을 주는 달항아리를 빚고 싶어요. 그러려면 강한 조형성과 가마불이 중요해요.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김동준 작가는 1981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어린시절에 대해 그가 오감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자주 그를 안고 ‘아리랑’을 부르던 할머니의 품과 노랫가락이다. 그는 “할머니가 나를 토닥거리며 부르시는 ‘아리랑’을 들으며 어린 마음에도 슬픔을 넘어선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점토를 만지고 비누 깎는 것을 좋아했다. 손재주가 있었다. 대구 청구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미술교사는 예술고등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경북공고를 선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교에 진학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매일 저녁 8시에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일용직을 구하는 봉고차를 타고 백화점 상·하차 같은 몸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일을 마치면 봉고차는 그를 비롯한 일꾼들을 새벽 3~4시에 같은 곳에 토해냈다. 잠시 눈을 붙인 후 학교에 갔다. 그림은 그리고 싶었다. 그는 “미대를 준비하는 아는 형들이 대구 외곽에 얻은 방 두칸짜리 작은 스튜디오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며 “월세 9만원은 여럿이 각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좋아지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새벽에 함께 봉고차에서 내린 아저씨들은 종종 고등학생인 저를 집에 바로 보내지 않았어요. 저를 둘러싸고 살벌한 농담도 많이 했죠. 밑바닥 삶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어요. 그런 날이면 계명대 앞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해가 뜰 때쯤이면 밤샘작업을 한 미대생들이 교정에서 내려왔어요.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커피숍으로 몰려가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부러웠겠군요.
“부러움을 넘어선 감정이에요. ‘내가 저 세계로 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지금 이대로라면 사회에서 제구실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가정형편에 예술가로서도 가능성이 별로 안 보이니,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해보자는 심정으로 경상대학 국문과에 진학했어요. 그리고 2001년 입대했는데 운명적인 일이 생겼어요.”
-어떤 일인가요.
“2002년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영화관에 갔어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관람했어요. 영화 말미에 방 안에 소품으로 놓인 달항아리 한 점에 시선이 꽂히더라고요. 기분이 묘했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완전히 심취했어요. ‘기운생동’(뛰어난 예술품을 이르는 말)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어요.”
-달항아리와의 첫 만남이네요.
“드디어 내가 원하는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미대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일단 빨리 도자를 배울 수 있는 전문대 도예과에 진학했어요. 입학하자마자 공장처럼 도자기를 많이 만들고 팔고 이익을 내는 프로 공방에 찾아가 하루 2시간만 자며 죽기 살기로 일을 배웠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생계를 위해 돈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회의가 느껴졌어요.”
-왜요.
“진짜 원하는 것은 차도구(茶道具)를 만드는 게 아니라 〈취화선〉에서 감동을 하게 한 항아리 같은 거였으니까요. 계명대 미대에 편입했어요.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학교 공부와 작업에 매진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거든요.”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답답했죠. 그러던 중 대구 동원화랑에서 열린 권대섭 선생의 백자대호(달항아리) 전시를 보게 됐어요. ‘이것이구나’ 했어요. 이후 운 좋게 학교 선배와 권대섭 선생이 교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때마침 권 선생이 스태프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고요. 선배에게 소개해달라고 부탁해 2007년 인생 첫 멘토이자 스승인 권대섭 선생을 만났어요.”
그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을 경기도 광주 권대섭 작가 작업실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일을 배웠다. 스승과 제자처럼 권대섭 작가가 옆에 붙어 알려주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답해주는 게 아니라 같이 공방에서 살아가며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터득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기술과 정보를 모두 버렸다. 그래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작가는 “권 선생 댁에서 보낸 4년은 내가 가진, 몸에 익었던 모든 것을 버리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생은 늘 ‘관요(官窯)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 말씀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관요는 고려·조선시대에 왕실용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정부가 직영관리했던 가마를 말한다. 김 작가는 권 작가의 말을 ‘조상들이 이어온 도자 정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로 받아들였다.
2011년 독립했다. 빚을 내 충북 보은 속리산 인근 산속에서 자신만의 가마를 만들었다. 첫 불을 때자마자 산 주인이 바뀌어 퇴거 통보를 받았다. 산 하나를 넘어 문경으로 옮겼다. 문경은 도예가들이 많은 고장이다. 그곳에서 첫 1년간은 차도구를 만들어 팔았다. 8년을 기다린 여자친구와 막 결혼을 한 터라 어느 정도 생활기반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달항아리를 빚었다. 원하는 달항아리를 완성하기 위해 숱하게 도전했지만, 실망과 좌절로 점철된 시간이 길었다.
201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차도구 전시가 대성공을 거뒀다. 2023년까지 전시와 주문이 밀려들었다. 고민 끝에 고사했다. 김 작가는 “달항아리를 충분히 표현할 역량이 없어 차도구를 파는 내가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차도구는 언제라도 만들 수 있지만, 진정한 달항아리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은 달항아리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2021년 뉴스프링프로젝트(구 서미갤러리)에서 30점을 전시했다. 결과는 이번 전시와 마찬가지로 완판.
그는 언젠가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만난 재일교포 3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려미술관은 재일교포 1세대인 정조문(1918~1989) 선생이 전재산을 털어 일본에 산재한 한국문화재를 수집해 1988년 설립했다. 정 선생이 우리 문화재 수집에 열정을 쏟게 한 계기도, 처음으로 구입한 일본 내 한국문화재도 조선백자였다. 김 작가는 고려미술관에서 조선 백자항아리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재일교포 3세를 목격했다.
“그분은 한국에 와본 적도 없는데 그저 뿌리를 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려미술관, 오사카 동양미술관 등을 찾아다녔다고 해요. 그러던 중 조선 달항아리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는 거예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국 공예는 단순한 기물을 넘어 민족의 자부심, 많은 사람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달항아리를 더 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동준 작가의 개인전은 오는 11월 24일까지 계속된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수개월 전 한 동양화가의 집에서 본 달항아리(백자대호)에 두고두고 마음을 빼앗겼다. 달항아리는 화가의 거실 한 켠 쪽창 앞 반닫이 위에 놓여 있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 것 같았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도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예찬하지 않았던가. 김환기는 프랑스 파리에 머물 당시 달항아리를 그리면서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영국의 유명한 현대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1887~1979)도 1935년 경성에서 조선의 달항아리를 구매하고 귀국하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애지중지하던 그 달항아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동준(41)의 달항아리는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가 그러했듯 대지, 흙을 연상시키는 요철이 살아 있다. 흙이 불에 구워지면서 생긴 철점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그는 현대 도예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전기나 가스가마를 거부하고 장작가마만 사용한다. 가마는 달항아리 한두 점만 구울 수 있도록 아주 작게 짓는다. 한 점 한 점에 정성을 쏟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 작가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지난 10월 20일부터 서울 신사동 갤러리LVS 본관과 종로구 부암동 응운당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 전시를 개막하기도 전에 출품작 20점이 모두 판매됐다. 상당수 컬렉터가 작품을 보지도 않고 구매했다. 현재 그의 달항아리 가격은 한 점당 1000만원을 웃돈다.
지난 19일 김동준 작가를 갤러리LVS에서 인터뷰했다.
“가마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고 시간이 흐르면 가마에 압력이 차고 온도가 올라가요. 그러면 ‘그르렁 그르렁’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죠. 마치 뜨거운 가마 안에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앉아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도 흥분상태가 되죠.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쳐요. 그렇게 가마와 온전히 교감하며 17시간 동안 혼자 불 앞을 지켜요. 잠시 가마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 때도 있어요. 그러다 마침내 ‘이때다’ 하며 불을 완전히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오죠.”
김동준 작가는 달항아리 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교감’, ‘일체감’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가마에 넣기 전 물레를 돌려 달항아리를 성형할 때도 흙과 내 몸이 일체감이 되는 찰나의 순간이 온다”며 “그때 바로 멈춰야 좋은 모양의 항아리가 된다”고 말했다.
달항아리는 높이와 몸체의 최대 지름이 거의 같다. 높이가 40㎝를 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큰항아리를 물레로 한 번에 구워 몸체, 어깨, 구연까지 성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반부와 하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다. 접합한 부분이 불에 구워지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 완전한 원형을 이루기는 어렵다. 살짝 이지러진 원형의 달항아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김 작가는 “성형한 항아리를 불에 구우면 수축해 작아지기 때문에 성형할 때 가능한 한 크고 둥근 달항아리를 지향한다”면서 “하지만 흙을 100% 컨트롤할 수 없는 데서 조형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흙을 100%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물레를 돌리다 보면 제어하기 어려워지면서 딱 멈춰야 할 순간이 느껴져요. 제가 어느 정도 생각한 그림은 있지만, 이미 그 항아리 안에 모양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예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일은 돌 속에 있는 천사, 노예 등을 빼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얘기예요. 저는 각각의 달항아리가 지닌 모습을 찾아줄 뿐이에요.”
-각각의 달항아리가 스스로 예정한 생김새가 있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재료의 핵심인 백토를 직접 구하러 다닌다고요.
“백토는 평지에는 없어요. 산맥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어요. 꼭 소고기 마블링처럼 황토와 섞여 있죠. 산을 헤매며 원하는 백토를 구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장작은 소나무인가요.
“소나무만 써요. 1년에 40~50t을 사용하죠. 아마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은 양일 거예요. 가마를 아주 작게 만들어 달항아리 한두 개만 넣어 굽기 때문에 불을 자주 때야 하거든요. 하루 17시간 불을 때고 나흘간 식혀야 하기 때문에 5일에 한 번씩 불을 때요. 남들은 큰 가마를 만들어 한꺼번에 구우라고 하지만, 그럴 경우 불량품이 많아지고 제가 원하는 작품이 안 나와요. 그래서 연료와 시간이 많이 소요돼도 작은 가마를 유지하는 거예요. 장작도 제가 직접 패요. 그런 몸을 쓰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좋은 달항아리를 빚기 위한 수행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요즘 도예가들은 전기나 가스가마를 많이 쓰는 것으로 알아요. 왜 어려운 장작가마를 고집합니까.
“예전에는 좋은 재료를 써야 달항아리가 잘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보다는 저의 의지가 달항아리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믿어요.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재료일 뿐, 세월이 쌓인 달항아리가 주는 에너지, 또 활활 타오르는 불에 몸을 맡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에 의한 질감을 표현하려면 저 역시 큰 에너지를 쓰고 집중과 열정을 다 쏟아부어야 해요.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혼이 담겨야 좋은 달항아리가 나오기 때문에 장작가마를 쓰는 거예요.”
그는 “달항아리 하나가 나오는 데 1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사람이 잉태돼 엄마의 자궁에서 영양분을 받고 성장하다 10개월 만에 세상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계절에 따른 루틴이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가을과 겨울은 건조하고 수분이 없잖아요. 이런 계절에는 나무를 자르고 흙의 수분을 빼기 좋아요. 그래서 광산에서 가져온 백토를 물에 풀어 묽게 만들고 한 번 걸러요. 그러면 쓸 수 있는 흙 외에 다 쓸려나가죠. 그런 다음 흙을 수비해 곰팡이가 안 생기도록 1년 동안 사용할 흙을 저장해요. 이때 흙을 잘못 만들면 한 해 작품을 다 망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이 시기에 장작도 패고요. 늦겨울과 봄에는 물레성형(달항아리 빚기)을 하고 늦봄부터 가을에 걸쳐 소성(불에 굽기)하면서 작품을 만들어요.”
-그야말로 작가의 지극한 정성을 받고 뜨거운 불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후 태어나는 거네요.
“달항아리를 빚고 가마에 굽기까지 소요되는 시간 동안 제게는 마음이 울컥하거나 울렁거리는 감동과 설렘이 있어요. 결과뿐 아니라 과정 또한 중요하고 예술 표현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달항아리에 집중하기 위해 그 기간에는 웬만하면 사람도 안 만나요. 또한 선한 마음가짐도 중요하다고 믿어요. 저는 상처에 덤덤한 달항아리의 모습이 좋아요. 사람도 엄마의 자궁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고통을 겪고 견디며 삶을 살아가잖아요. 저마다 조금씩 다른 조형성을 보이는 달항아리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고 믿어요.”
-같은 작가의 달항아리라도 질감, 전과 굽, 모양, 색깔 등이 조금씩 다르지요. 사람들은 김 작가의 달항아리에서 어떤 점을 특히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가정하면 호랑이라는 존재에 압도되지 줄무늬를 감상하지는 않잖아요. 바라본 순간 ‘이거 뭐지!’ 하는 느낌, 오감으로 짜릿함을 주는 달항아리를 빚고 싶어요. 그러려면 강한 조형성과 가마불이 중요해요.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김동준 작가는 1981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어린시절에 대해 그가 오감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자주 그를 안고 ‘아리랑’을 부르던 할머니의 품과 노랫가락이다. 그는 “할머니가 나를 토닥거리며 부르시는 ‘아리랑’을 들으며 어린 마음에도 슬픔을 넘어선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점토를 만지고 비누 깎는 것을 좋아했다. 손재주가 있었다. 대구 청구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미술교사는 예술고등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경북공고를 선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교에 진학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매일 저녁 8시에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일용직을 구하는 봉고차를 타고 백화점 상·하차 같은 몸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일을 마치면 봉고차는 그를 비롯한 일꾼들을 새벽 3~4시에 같은 곳에 토해냈다. 잠시 눈을 붙인 후 학교에 갔다. 그림은 그리고 싶었다. 그는 “미대를 준비하는 아는 형들이 대구 외곽에 얻은 방 두칸짜리 작은 스튜디오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며 “월세 9만원은 여럿이 각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좋아지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새벽에 함께 봉고차에서 내린 아저씨들은 종종 고등학생인 저를 집에 바로 보내지 않았어요. 저를 둘러싸고 살벌한 농담도 많이 했죠. 밑바닥 삶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어요. 그런 날이면 계명대 앞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해가 뜰 때쯤이면 밤샘작업을 한 미대생들이 교정에서 내려왔어요.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커피숍으로 몰려가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부러웠겠군요.
“부러움을 넘어선 감정이에요. ‘내가 저 세계로 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지금 이대로라면 사회에서 제구실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가정형편에 예술가로서도 가능성이 별로 안 보이니,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해보자는 심정으로 경상대학 국문과에 진학했어요. 그리고 2001년 입대했는데 운명적인 일이 생겼어요.”
-어떤 일인가요.
“2002년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영화관에 갔어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관람했어요. 영화 말미에 방 안에 소품으로 놓인 달항아리 한 점에 시선이 꽂히더라고요. 기분이 묘했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완전히 심취했어요. ‘기운생동’(뛰어난 예술품을 이르는 말)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어요.”
-달항아리와의 첫 만남이네요.
“드디어 내가 원하는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미대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일단 빨리 도자를 배울 수 있는 전문대 도예과에 진학했어요. 입학하자마자 공장처럼 도자기를 많이 만들고 팔고 이익을 내는 프로 공방에 찾아가 하루 2시간만 자며 죽기 살기로 일을 배웠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생계를 위해 돈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회의가 느껴졌어요.”
-왜요.
“진짜 원하는 것은 차도구(茶道具)를 만드는 게 아니라 〈취화선〉에서 감동을 하게 한 항아리 같은 거였으니까요. 계명대 미대에 편입했어요.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학교 공부와 작업에 매진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거든요.”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답답했죠. 그러던 중 대구 동원화랑에서 열린 권대섭 선생의 백자대호(달항아리) 전시를 보게 됐어요. ‘이것이구나’ 했어요. 이후 운 좋게 학교 선배와 권대섭 선생이 교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때마침 권 선생이 스태프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고요. 선배에게 소개해달라고 부탁해 2007년 인생 첫 멘토이자 스승인 권대섭 선생을 만났어요.”
그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을 경기도 광주 권대섭 작가 작업실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일을 배웠다. 스승과 제자처럼 권대섭 작가가 옆에 붙어 알려주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답해주는 게 아니라 같이 공방에서 살아가며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터득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기술과 정보를 모두 버렸다. 그래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작가는 “권 선생 댁에서 보낸 4년은 내가 가진, 몸에 익었던 모든 것을 버리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생은 늘 ‘관요(官窯)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 말씀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관요는 고려·조선시대에 왕실용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정부가 직영관리했던 가마를 말한다. 김 작가는 권 작가의 말을 ‘조상들이 이어온 도자 정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로 받아들였다.
2011년 독립했다. 빚을 내 충북 보은 속리산 인근 산속에서 자신만의 가마를 만들었다. 첫 불을 때자마자 산 주인이 바뀌어 퇴거 통보를 받았다. 산 하나를 넘어 문경으로 옮겼다. 문경은 도예가들이 많은 고장이다. 그곳에서 첫 1년간은 차도구를 만들어 팔았다. 8년을 기다린 여자친구와 막 결혼을 한 터라 어느 정도 생활기반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달항아리를 빚었다. 원하는 달항아리를 완성하기 위해 숱하게 도전했지만, 실망과 좌절로 점철된 시간이 길었다.
201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차도구 전시가 대성공을 거뒀다. 2023년까지 전시와 주문이 밀려들었다. 고민 끝에 고사했다. 김 작가는 “달항아리를 충분히 표현할 역량이 없어 차도구를 파는 내가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차도구는 언제라도 만들 수 있지만, 진정한 달항아리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은 달항아리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2021년 뉴스프링프로젝트(구 서미갤러리)에서 30점을 전시했다. 결과는 이번 전시와 마찬가지로 완판.
그는 언젠가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만난 재일교포 3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려미술관은 재일교포 1세대인 정조문(1918~1989) 선생이 전재산을 털어 일본에 산재한 한국문화재를 수집해 1988년 설립했다. 정 선생이 우리 문화재 수집에 열정을 쏟게 한 계기도, 처음으로 구입한 일본 내 한국문화재도 조선백자였다. 김 작가는 고려미술관에서 조선 백자항아리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재일교포 3세를 목격했다.
“그분은 한국에 와본 적도 없는데 그저 뿌리를 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려미술관, 오사카 동양미술관 등을 찾아다녔다고 해요. 그러던 중 조선 달항아리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는 거예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국 공예는 단순한 기물을 넘어 민족의 자부심, 많은 사람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달항아리를 더 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동준 작가의 개인전은 오는 11월 24일까지 계속된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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