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읽었을 뿐인데 50여년의 삶이 스친다…연극 '러브레터'

조재현 기자 2022. 11. 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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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내 펜으로, 내 글씨로 쓴 이 편지, 내 모든 것에서 나온 이 편지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무대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테이블에 앉은 원로배우 2명이 자신들 앞에 놓인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편지를 낭독하는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정이 든다.

두 주인공이 8살부터 시작해 50여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가는 연극 '러브레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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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통의 홍수 속 만난 편지의 매력…13일까지 예술의전당
박정자-오영수, 배종옥-장현성…연기 거장들의 담백한 무대
연극 '러브레터' 공연 사진. 배우 박정자와 오영수. (파크컴퍼니 제공)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내 손으로, 내 펜으로, 내 글씨로 쓴 이 편지, 내 모든 것에서 나온 이 편지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무대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테이블에 앉은 원로배우 2명이 자신들 앞에 놓인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흔한 배경 음악도 없다. 편지를 읽는 동안 서로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는다. 그저 관객과 마주 보고 앉아 총 333통의 편지 내용을 들려줄 뿐이다.

호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전 세계 누구와도 재빠르게 소통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편지를 낭독하는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정이 든다. 그들의 목소리에, 편지지의 바스락거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다방면에서 모범생인 '앤디'와 자유분방한 예술가 '멜리사'. 두 주인공이 8살부터 시작해 50여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가는 연극 '러브레터'다. 미국의 극작가 A.R. 거니의 대표작으로, 1988년 뉴욕에서 초연한 이래 현재까지 30개 언어로 번역돼 무대에 오르는 스테디셀러다.

"난 편지만 쓰고 싶지 않아. 정말 싫어. 난 네가 보고 싶단 말이야."(멜리사)

"너한테 편지 쓰는 게 제일 좋아. 옛날부터 그랬어. 편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앤디)

배우 오영수. (파크컴퍼니 제공)
배우 박정자. (파크컴퍼니 제공)

앤디가 멜리사의 어머니에게 멜리사의 생일 파티에 초대해준 것에 대한 감사 편지를 쓰면서 두 사람의 편지 여정은 시작된다.

앤디는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멜리사는 그렇지 않다. 편지를 쓰는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가 많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고민을 털어놓는 수단은 결국 편지다.

행복했던 유년기와 사랑에 탐닉하던 10대 시절을 거쳐 각자 가정을 꾸린 뒤 정치인과 예술가로 살아가는 동안 편지는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매개였다.

그렇게 편지는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인생의 모든 기록이 된다. 연기 경력 60여년의 원로 배우 박정자와 오영수는 각각 멜리사와 앤디로 분해 미숙과 성숙,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배우가 무대를 활보하지도, 격정적인 움직임도 없으나 지루할 틈은 없다. 머리가 하얗게 센 두 배우는 섬세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관객들을 쥐락펴락한다.

장난기 가득한 편지를 읽을 때면 영락없는 8살 소년과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때로는 아쉬움을 표하다 어느덧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정과 사랑을 오가는 앤디와 멜리사의 감정을 두 배우는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연극 '러브레터' 공연 사진. (파크컴퍼니 제공)

실제 두 배우는 1971년 극단 자유에서 처음 만나 50년 이상 무대 안팎에서 우정을 이어온 사이다.

어린 시절 서로 주고받은 그림들이 동화책 속 그림처럼 무대 곳곳에서 튀어나올 때면 잔잔한 웃음도 터져 나온다.

박정자-오영수 외에도 배종옥-장현성이 선사하는 멜리사와 앤디도 만날 수 있다. 연극 '라스트 세션' 킬 미 나우' 등을 연출한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다. 공연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오는 13일까지 이어진다.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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