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지침 없어서..." 책임 회피 경찰·지자체, 있는 매뉴얼도 안 지켰다
'주최 없는 행사' 대응 연구 용역 발주한 경찰
"경찰 관리" 지적에 보고회 열고도 나 몰라라
용산구, 사전 협의 때 소방에 '공조' 요청 안 해
“주최 측 없는 다중 인파사건 대응 매뉴얼은 없는 것으로 안다.”(경찰청 기자간담회) “주최자가 없는 행사는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었다.”(행정안전부 브리핑) “저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하지 않아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분이 없다.”(박희영 용산구청장)
“매뉴얼이 없다.” 이태원 압사 사고가 터진 후 경찰,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너나 할 것 없이 앵무새처럼 되뇐 말이다. 매뉴얼이 없으니 안전관리 의무도 없다는 변명이다. 정말 매뉴얼을 만들 기회는 없었을까. 있었다. 이들 기관도 오래 전부터 위험 신호를 충분히 느꼈다.
3,000만 원 연구용역 발주하고도 경찰은 '모르쇠'
1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경찰은 7년 전 이미 ‘주최 측 없는 다중 인파 사건’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찰청은 2015년 7월 3,000만 원을 들여 대구가톨릭대 산학협력단에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를 위한 경찰 개입수준에 관한 연구’ 용역을 위탁했다. 연구팀은 석 달 뒤 223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주최 없는 행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관리해야 하고 △관리 주체는 경찰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비록 공공의 목적을 위해 진행되는 행사가 아니더라도 경찰의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의 보호”라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보고서는 당시 진행한 여러 연구용역 중 하나라 반영이 안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서가 나온지 7년이 지났지만, 매뉴얼은 단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경찰은 당시 경찰청 경비과장, 위기관리센터장, 경비과 담당자 등이 참석하는 평가 보고회를 연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정책연구 활용결과 보고서’에 연구 결과를 행사 안전관리 계획 수립시 적정 경찰력 배치모델에 반영하고,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 메뉴얼 개정시 활용하겠다고 적었다.
경찰 관계자는 “2015년 이후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을 아직 개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후속 조치가 부족했던 부분”이라며 “다만 현장에서는 연구용역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지침, 안전계획 등을 보완해 지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다 유동인구 예상하고도 손 놓은 용산구청
소극적 대처는 지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이태원은 10월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지구촌축제(10월 중순)를 시작으로 핼러윈 데이(10월 31일)까지 2주가량 축제가 계속된다. 하지만 지역 안전관리 의무가 있는 용산구는 질서유지에 무심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유관기관 간담회에는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장, 여성청소년과장, 형사과장, 이태원파출소장, 이태원역장, 용산구청 자원순환과, 상인단체인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관계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대책 필요성을 주장한 건 상인들이었다. “3년 만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없는 핼러윈이라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다” “길가에 있는 테이블 등을 치워야 한다” 등의 의견을 냈지만 뾰족한 대응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회의 직후 열린 상인단체와 용산구청 간담회에도 구청 측은 보건위생과 직원만 보냈다. 지자체가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행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안전관리에 손을 놓은 것이다.
심지어 행사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할 때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소방 관계자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방청 관계자는 “지역축제 안전관리는 재해대처 계획에 따라 경찰, 소방 등 유관기관들이 사전에 협의하게 돼 있다”면서도 “이번에는 사전 공조 요청이 없었다”고 말했다.
“매뉴얼 탓 이제 그만”
행정당국은 비슷한 매뉴얼을 활용할 기회도 놓쳤다. 소방방재청(현 소방청)은 2005년 경북 상주 공연장 압사사고 뒤 이듬해 안전매뉴얼을 만들었다. 해당 매뉴얼은 공연장 및 공연장 이외의 장소에서 국가, 지자체, 민간단체 등이 주최하는 축제, 공연, 행사 등에 포괄적으로 적용된다. 행사ㆍ공연장에서 입석은 면적 0.2㎡당 1명, 즉 1㎡당 5명까지 수용하도록 돼 있다. 정부 차원의 밀집도 기준이 존재하는 만큼 이를 준용해 적극 대처해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매뉴얼 탓만 하는 관계당국의 ‘행정편의주의’ 행태가 참사를 유발한 또 다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는 “행정기관이 각자 영역에서 규정만 따지고 있으니 인파 운집이 예상되는데도 대비하지 않은 것”이라며 “지역 재난 예방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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