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회차를 산다"...젊은 세대 좌절 투영된 회귀서사
'깨어나 보니 죽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몇 년째 웹툰, 웹소설에서 유행하고 있는 회귀 서사가 안방 극장을 점령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주인공이 과거의 기억을 가진 채,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온다는 게 회귀 서사물의 얼개다. 드라마는 인생 n회차를 가정하고 묻는다. 인생을 리셋한다면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어긋난 사랑, 막대한 부와 권력, 완수하지 못한 복수… 회귀물에는 현생에서 충족하지 못한 욕망이 넘실댄다.
황당무계한 설정? 사이다 복수, 빠른 서사의 쾌감
지난 5월 종영한 SBS의 '어게인 마이 라이프', 11월 방영될 JTBC의 '재벌집 막내아들'은 동명의 회귀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다. 다시 태어난 주인공들은 2회차 인생에서 복수의 칼날을 벼른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의 검사 김희우(이준기)는 조태섭(이경영)의 비리를 쫓다 살해당한 후 대학 재수 시절로 돌아와 차근차근 복수를 계획한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윤현우(송중기)는 재벌 총수 일가의 비서로 일하다 누명을 쓰고 버려진 뒤 재벌가의 막내 아들 진도준으로 회귀해 복수를 위한 치열한 승계 전쟁에 뛰어든다.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최근 유행했던 다크 히어로물은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면, 회귀물은 그런 지난한 노력의 과정 없이 다시 태어나거나 역할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며 "그러다 보니 서사 속도도 굉장히 빨라지고, 보는 사람에게 더 큰 통쾌함을 선사한다"고 분석했다.
정통 서사에 익숙한 이들은 회귀 서사를 다소 황당무계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대중이 특정 서사를 즐겨 찾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MBC '금수저' 같은 경우에도 신분이 바뀌는 '왕자와 거지', '옹고집전' 등 진가쟁주(眞假爭主·주인의 자리를 두고 진짜와 가짜가 다툰다)의 설화 형식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이라며 "회귀 서사도 리얼리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대중의 욕망이나 의식이 투영된 대중 서사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금수저'는 운명을 바꿔주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물건(금수저)을 얻게 된 흙수저 이승천(육성재)이 부잣집 친구와 부모를 바꾼다는 내용이다.
윤 교수는 "(회귀 서사의 원류인) 웹툰, 웹소설의 주요 소비층이 10·20대라고 했을 때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것들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 좌절감, 무기력 같은 현실 인식이 이런 회귀 모티브를 소비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악마판사', '모범택시', '빈센조' 등 공적 심판 대신 사적 복수를 택하는 다크 히어로물이 쏟아진 데서 사법 불신이라는 대중 정서를 읽을 수 있듯이, 이런 회귀물의 증가에도 시대상이 반영됐다는 의미다.
"젊은 세대 현실 인식 반영"...한계는?
그런 면에서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이 진작부터 웹툰, 웹소설 업계의 성공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회귀 서사의 변주로, 한 인물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회귀), 결말을 아는 소설 속 인물이 되는 것(빙의), 죽었다가 다른 인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환생)을 가리킨다. 카카오페이지 웹툰 랭킹 1~10위(2022년 9월 기준) 가운데 '악녀는 마리오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 '도굴왕' 등 6개 작품이 회·빙·환으로 분류된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경우 미국, 태국, 대만 등 각국에 진출한 카카오웹툰의 현지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3,000만 명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전대진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노블사업팀 팀장은 "웹툰, 웹소설은 기본적으로 독자가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느끼는 대리 만족이 굉장히 높은 콘텐츠"라며 "특히 회귀물, 환생물 같은 퓨전 판타지는 문화적 진입 장벽이 낮아 글로벌 독자에게도 사랑받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회귀물이 포화 상태인 데다 서사 자체의 한계가 있는 만큼, 인기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2000년대 초반까지 드라마를 지배했던 재벌 2세 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서사가 수명을 다한 것과 마찬가지다. 김민정 교수는 "K드라마의 특징은 현실 비판의 세계관이었는데, 이런 회귀 서사에는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이 담기기보다는 그냥 즐기는 타임 킬링용이 되기 쉽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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