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정권 1년 만에 창경, 창덕궁은 두 번 불탔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2. 11. 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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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백성을 무시하고 권력만 좇았던 오군(汚君) 인조
서울 종로구에 있는 창경궁 명정문과 본전인 명정전. ‘동궐’이라 불리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백성에 의해, 1623년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 무리에 의해, 1624년 인조를 몰아내려는 이괄 세력과 인조에 실망한 백성에 의해 세 차례 방화됐다. 세 번 모두 권력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반정세력은 권력에 빠져 개혁을 외면했고, 그 결과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달아나는 인조를 조선 백성은 외면했다./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wSxGzcenjF0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선 수도 한성에 있던 궁궐들이 불탔다. 경복궁이 불탔고 창덕궁, 창경궁이 불탔다. 방화였다. 방화 원인 제공자는 중국 망명길을 떠난 국왕 선조였고 방화범은 백성이었다. 전후에 갈 곳 없는 선조는 성종 큰형 월산대군이 살던 정동집을 궁궐로 개조해 들어갔다. 아들 광해군은 창덕궁에 살았다. 경복궁 동쪽에 있는 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한다.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이 된 인조 정권 때 동궐은 두 번 더 불탔다. 그것도 정권을 빼앗고 만 1년도 안 돼서. 한 번은 인조반정 무리 실화(失火), 한 번은 ‘새 세상을 만들겠다’며 정권을 찬탈한 인조 정권을 혐오한 이괄 반군과 백성에 의해. 권력욕에 눈멀어 서로 다툼을 벌이다 백성에게 외면당하고 애꿎은 궁궐만 태워 먹은 인조 정권 이야기.

첫 방화, 1592년 4월 임진왜란

임진년 음력 4월 13일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해 20일 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일본군 진입 전 선조는 왕비와 후궁 5명, 아들 7명, 딸 2명, 며느리 5명, 사위 1명 등 21명과 두 형을 경복궁에 모아놓은 상태였다.(신명호, ‘임진왜란 중 선조 직계 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호, 군사편찬연구소, 2011) 전황이 비극적으로 불리해지자 선조는 4월 30일 폭우 속에 임진강을 건너 명나라를 향해 북진했다. 모래재를 넘을 무렵 선조를 호종한 류성룡이 한성 쪽을 보니 이미 도성이 불타고 있었다.(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주, 아카넷, 2013, p207)

방화범은 백성이었다. 이들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진 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창고를 노략한 뒤 불을 질렀다. 경복·창경·창덕궁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재물 많기로 소문난 선조 맏아들 임해군과 병조판서 홍여순 집도 전소됐다. 한성임시수비대장인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난민 몇 목을 벴지만 역부족이었다. 각종 서적과 ‘고려사’ 초고(草稿), 그때까지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불구덩이에 사라졌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짐을 꾸리는 순간에도 “한성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거짓말한 국왕에 대한 분노가 낳은 참극이었다.(같은 날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의 허황된 토목공사

전쟁 와중인 1593년 10월, 중국 망명을 포기하고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남산 소나무를 베서 경복궁에 작은 전각을 지으라 명했다.(1593년 10월 25일 ‘선조실록’) 다음 날 사헌부는 “굶주린 백성을 고달프게 한다”며 이를 반대했고, 선조는 바로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608년 죽을 때까지 월산대군 집, 정동행궁에 살았다.

그리고 전쟁 동안 선조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던 세자 광해가 왕위를 계승했다. 전란 위기 관리는 물론, 명·청 중립외교를 포함해 광해군은 외치(外治)에는 능했다. 그런데 내치가 문제였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대군 생모인 선조 왕비 김씨(인목왕후)를 정동행궁에 유폐시키며 권력을 강화했다. 권력 기반은 대북파였고, 대북파는 그때까지 권력 집단이었던 서인과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누렸다.

그 권력의 상징으로 광해군은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 자수궁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광해군은 풍수에 능하다고 소문났던 임란 파병 명나라 병사 시문룡(施文龍)을 불러 이들 궁궐 터를 골랐다.(1616년 3월 24일 ‘광해군일기’) 경덕궁 터는 또 다른 이복동생 정원군이 살던 곳이었다. 정원군 아들인 능창군 이전은 1615년 광해군에 의해 역모 혐의로 목을 매고 죽었다.(1615년 11월 17일 ‘광해군일기’)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한 조치는 모조리 반군 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가 됐다. 반군을 주도한 사람은 경덕궁 터에 살던 정원군의 맏아들이자 능창군 이전의 형, 능양군 이종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1623년 능양군 이종이 지휘한 반군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권력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은 반란군 실화(失火)로 많은 전각이 불탔다./박종인 기자

두 번째 방화, 1623년 3월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집안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능양군과 권력 탈환을 노리던 서인은 마침내 서울 인왕산 아래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義(의)’자를 적은 천을 가슴팍에 붙여놓았듯, 이들은 명에 배신하고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를 처단한다고 했다. 며칠째 술에 취해 있던 광해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궁궐을 탈출했다. 광해군은 후원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 의관 안국신 집에 있다가 검거됐다.

광해군이 사라진 창덕궁에 반군이 뒤늦게 뛰어들었다. 이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궐에 불이 붙었다. 함께 들어왔던 능양군 이종이 화재 진화를 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본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궐내 건물이 몽땅 불 속에 사라졌다. 화재 진압 후 잿더미 속에서 은 4만냥이 튀어나왔다. 광해군이 가죽 주머니에 싸서 침실에 숨겨뒀던 돈이었다.(이상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일기’) 다음 날 광해군이 검거된 직후 능양군은 경운궁(옛 월산대군집)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 가서 반정을 정식 허가받았다. 그리고 능양군이 광해군에 이어 왕에 즉위했다. 창덕궁이 전소된 탓에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벌어졌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여러 날 이어지고 인조가 선언했다. “부정한 재물은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이후 이를 경계로 삼겠다.”(1623년 3월 15일 ‘인조실록’) 부정한 광해 시대를 청산하고 개혁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권력, 권력, 오직 권력

“금수(禽獸)의 땅이 다시 사람 세상이 되었다.”(1623년 3월 17일 ‘인조실록’)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반정 세력 공언은 허언이었다. ‘조정의 사대부가 하는 행위는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1623년 7월 27일 ‘인조실록’), ‘하는 짓이 광해군 때보다 심하고 부역이 날로 더 늘어 원망이 자자하니 역모를 꾸릴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1623년 10월 1일 ‘인조실록’)

반정 세력 내부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도 나왔다. 반정 당일 반군을 지휘해 앞장서서 궁궐로 진군한 이괄이 그랬다. 당연히 1등 공신이 되리라 생각했던 이괄은 정적 김류에 의해 2등 공신으로 격하됐다. 무장(武將)인 이괄은 평안병사로 임명돼 서울을 떠났다. 평안도로 떠나던 날 인조가 칼을 채워주고 수레바퀴를 밀어주었다. 위로하는 1등 공신 신경진에게 이괄이 말했다.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은 속이지 마시오.”(‘연려실기술’ 24 인조조고사본말 ‘이괄의 변’)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사람 살게 만들겠다’던 공약과 달리 백성은 살기 힘들고 권력은 아귀다툼에 빠진 금수의 세상이 돌아와 있었다.

서울 청운동 창의문에 걸려 있는 계해거의(癸亥擧義) 정사공신(靖社功臣) 현판.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공신 명단이다. 당연히 1등 공신이리라 여겼던 이괄은 경쟁자들에 의해 저평가를 받아 2등 공신으로 책록됐고, 이에 대한 불만과 정적들 시기심이 융합돼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1743년 정조 명으로 만든 이 현판에는 ‘역적’ 이괄 이름이 빠져 있다./박종인 기자

세 번째 방화, 1624년 1월 이괄의 난

해가 바뀌었다. 서울에 있던 반정세력 사이에서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를 꾸민다’는 말이 나왔다. 인조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역모 고발은 이어졌다. 1월 21일 평안도로 감찰을 나간 조정 관리 눈앞에서 조선 팔도 최정예병인 이괄 부대 1만2000 병력과 임진왜란 때 투항했던 베테랑 일본 병사 130명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연려실기술’, 앞 부분) 이괄은 찾아온 관리들에게 “아들이 죽게 생긴 판에 내가 어찌 온전하겠는가”라며 대놓고 반역을 선언했다.

그리되었다. 사흘 뒤 이괄은 파견된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괄 목에 신분과 상관없이 1등공신과 1품 품계를 내걸었다.(1624년 1월 24일 ‘인조실록’)

이괄 부대는 파죽지세로 무악재(모래재)를 넘어 한성에 입성한 뒤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내세웠다. “도성 안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 그러자 반군에 동조한 군사 수천 명이 무악재에서 이들을 영접하며 길을 인도했고 관청 서리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 맞이했다. 한성 백성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아 이들을 맞았다. 한성에 입성한 이괄은 경복궁 옛터에 병영을 차렸다.(이상 ‘연려실기술’ 앞 부분)

그사이 인조는 공주로 달아났다. 일행이 한강에 이르자 강 건너에 배가 보였다. 호종 무사 우상중이 헤엄쳐 배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전라병사 이경직이 칼을 빼내 인조를 겨우 배에 태웠다. 강 한가운데에서 뒤를 돌아보니 궁궐이 난민(亂民)에게 불태워져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다.(1624년 2월 8일 ‘인조실록’) 창덕궁에 난입한 반군과 ‘나쁜 무리’들이 노략질을 하고 불을 질렀다. (’궁궐지’2-창경궁지, 서울학연구소, 1996, p33. ‘창경궁’,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2008, p48, 재인용) 죽을 뻔했던 인조가 다음 날 양재역에 도착했다. 김이라는 유생이 팥죽을 인조에게 올렸다. 인조는 그를 의금부도사에 임명했다.(1624년 2월 9일, 12일 ‘인조실록’) 난이 평정되고 공주에서 환도한 인조는 자기 옛집 터에 광해군이 세운 경덕궁(경희궁)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

여기까지가 창경궁, 창덕궁 두 궁궐이 화재를 맞았던 이야기다. 그런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양재에서 팥죽을 얻어먹은 다음 날, 인조에게 관리들이 이렇게 권했다. “동래 왜관에 일본인 1000명이 있다는데, 이들을 병사로 쓰면 반군을 물리칠 수 있나이다.” 인조는 “즉시 청왜사(請倭使)를 보내라”고 명했다. 청왜사로 임명된 사람은 한강에서 인조를 배에 태웠던 이경직이다. 그가 동래로 출발 직전 물었다. “일이 지연되면 어떡하고 일본 본국에서 군사가 오면 어떡할까요.” 인조가 답했다. “그건 그렇다. 가지 말라.”(1624년 2월 10일 ‘인조실록’) 나라와 백성을 하찮게 여기고, 외국군을 부르는 이 행태. 망국(亡國)으로 가는 전형적인 패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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