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잊히겠다던 文의 막후 상왕 정치

배성규 논설위원 2022. 11.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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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식 ‘사저 정치’와 닮은꼴
정치 안 한다더니 행동은 반대
수시 동향 보고 받고 친문 규합
이재명 이후 상왕 역할 꿈꾸나
2022년 8월 29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더불어민주당 제공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마을 사저에서 매일 지지자들을 만났다. 수백명 앞에서 10여 분 동안 연설하고 문답도 했다. 기분이 좋으면 두 번 나오는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사저 정치를 즐겼다. 그래서 “국회의원으로 정치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잊힌 삶을 살겠다”고 했다.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말과 달랐다. 퇴임 2주일도 안 돼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난다고 했다. 백악관이 부인했지만 결국 전화 통화를 했다. 외교부에서 통역 지원까지 받아냈다.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는 누리호 발사가 성공하자 윤석열 대통령보다 먼저 “자랑스럽다”는 축하 메시지를 냈다.

문 전 대통령은 윤석열 정부를 향해 “정권이 바뀌어도 9·19 남북 군사합의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핵 선제 타격을 법제화한 뒤 숱하게 미사일을 쏘고 군사합의를 깨도 “북한과 대화에 나서라”며 오히려 윤 정부를 압박했다. 문 전 대통령 측근들은 걸핏하면 새 정부 노선과 정책을 비난했다. 감사원 조사엔 “무례한 짓”이라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양산으로 내려오자마자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수시로 자기 근황을 올렸다. 사저 앞 시위를 비판하는 글부터 산행 중 컵라면을 먹는 모습, 텃밭을 가꾸고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진 등을 잇따라 띄웠다. 지지자들이 사저를 찾아오면 현관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문재인 권장 도서’를 10여 차례나 추천했다. 윤석열 정부 인사들에게 읽어보라고도 했다. 책을 통해 자기 생각과 정책이 맞았다고 강변하는 듯했다. 지지층엔 ‘나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노 전 대통령 못지않은 사저 정치였다.

문 전 대통령은 최근 윤건영 의원 등 측근들로부터 수시로 정국 동향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전해철·양정철 등 ‘3철’로 불리던 인사들과 접촉도 잦다고 알려졌다. 친문 의원들도 수시로 양산을 찾는다. 서해 공무원 월북 몰이와 북 어부 강제 북송, 이상직 전 의원 채용 청탁 의혹에 대한 수사·감사가 급물살을 타고 김정숙 여사 인도 방문 논란까지 재점화하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일부 의원은 문 전 대통령에게 “걱정이 돼 잠이 안 온다”고 우려를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친문은 이재명 대표가 문 전 대통령의 보호막이 돼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대선 때도 이 대표와 손을 잡았다. “친명과 친문은 같다” “명문(明文) 정당이 되자”고 했다. 그런 이 대표가 각종 비리 의혹으로 벼랑에 몰려 있다. 지금은 검찰 수사에 맞서 양측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 대표가 잘못된다면 문 전 대통령도 더 이상 ‘이재명 방탄’ 뒤에 숨을 수 없다.

문 전 대통령은 그동안 본인이 책임지거나 입장을 밝혀야 할 때마다 뒤로 빠져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버티긴 쉽지 않다. 그래서 서해 공무원 사건에 대해 직접 입장 표명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본인이 깃발을 들고 전면에 나섬으로써 흩어졌던 친문과 지지층을 재규합하려는 것이다. 친문 진영에선 “30%대 지지율의 윤 정부가 이 대표에 이어 문 전 대통령까지 치긴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설사 이 대표가 잘못되더라도 문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뭉치면 검찰 수사를 막고 야권도 재편할 수 있다는 계산일 것이다. 잊히겠다던 말과 달리 문 전 대통령은 이해찬 전 대표식의 막후 ‘상왕 정치’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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