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 일상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생각함

기자 2022. 11. 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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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이다. 이 말은 용감했지만,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남성문화의 일부이자 30년이 넘은 신자유주의 통치 패러다임일 뿐이다. 물론 ‘구조도 구조적 문제도 없다’는 비현실이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도 증류수 같은 현실도 불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사회 구조적 문제다.

정희진 여성학자

구조와 구조주의는 다르다. 구조는 사회의 물리적, 정치경제적, 심리적 관계들을 의미하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되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 몸 외부에서 찾는 사고가 구조주의이다. 성별이든 계급이든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는 없지만 구조에 대한 개인의 인식, 반응(reaction), 대처, 행위는 다르다. 그래서 포스트(후기) 구조주의가 등장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개인과 구조 사이의 저항, 충돌, 협상 등을 중요시하고 이 과정에서 구조와 개인 모두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개인의 관념성과 구조주의에 내재한 환원주의가 모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에 “있다”고 외쳐 봤자, 모든 갑들은 귀찮거나 무슨 말인지 모른다. 국가 권력이든 개인 사이의 권력이든 일상에서 체감하는 영향력 혹은 책임감으로서 힘의 관계는 인간의 조건이고, 구조는 사회라는 ‘집 전체’를 이룬다. 구조를 부정하는 것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남성문화는 근대 국가가 역사상 최고 수준의 사회 조직이라고 믿으며 정상(正常) 국가, ‘이왕이면’ 정상(頂上) 국가를 꿈꾸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구조론’은 이 정권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나쁜 정부’가 아니라 (행)정부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조적 문제지만 가장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는 사안이 성매매이다. ‘페미니스트’들도 성매매의 성별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뿌리 깊고 복잡한 남성 문제다. 여성주의 연구나 정치경제학 연구 중에서도 ‘동의-강제’의 이분법(자유주의)을 벗어나기 어렵고, 연구자도 사회적 관심도 적다. 범죄학에서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s)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도박과 매춘은 전통적으로 피해자 없는 범죄로 인식되어 왔다. 범죄이되, 피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는 논리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

성 산업에는 피해자가 없는가. 알선업, 대부업, 임대업, 성형업, 요식업, 숙박업 관련 종사자, 남성 구매자, 여성 판매자(정확히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몸)는 모두 피해와 가해와 무관한가? 최근 출간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기획하고, 연구자 12명이 참여한 <불처벌>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처벌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다. 성매매 연구서지만 여성학 입문서이자 전문서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조적인 문제로서 젠더, 돈과 성별을 매개로 인간 행동의 다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젠더는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여성주의 책을 읽은 바 없다. 그런 논리가 있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다. 여성들 내부에는 나이, 계급, 인종 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젠더는 여성(female)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인식론이다. 구조적 문제로서 젠더는 성차별뿐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현실도 포함한다. 남성들 간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성매매는 남성 사이의 차별과 적대를 봉합해온 제도화된 남성 연대이다.

<불처벌>에 나온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글에 인용된 부분은 나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책 전체를 읽기 바란다. 책을 사지 않아도 좋다. 공동체를 위해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하자.

황유나의 서문은 이 책을 요약한다. “성 판매자의 성별은 압도적으로 여성이다.”(7쪽) 성매매는 개인 사이의 성적 거래를 넘어 여성의 몸과 성을 상품화, 확대 재생산하는 산업과 자본의 문제다. 성을 매매하는 경로가 성별에 따라 정반대임에도 구매자와 ‘판매자’는 현행 성매매처벌법에 따라 동일하게 처벌받는다. 성매매로 처벌받는 남성은 ‘억울하고’ 여성은 ‘수치스러운’ 두 갈래의 사회적 감정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9쪽)

실제 일상에는 이분법이 없다

남성들의 성 구매 동기는 그 자체로 성별 권력관계를 증명한다.(76쪽,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중 성 구매 동기가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재 성매매처벌법은 ‘동의’를 통해 성매매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이 놓인 곤궁과 취약성, 성매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착취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무시하고 있다.(113쪽) 강간 사건 피해자 A씨는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성매매하려고 만났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성매매처벌법 위반 혐의 피의자로 조사했다.(121쪽)

성매매 집결지가 사라졌다고 해서 성매매가 없어지거나 축소되지 않았음은 명확하다.(142쪽) 사회와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은 살면서 자기가 겪은 모든 부당함을 팔자로 체념하는 것을 막고 짐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187쪽) 나는 학술대회에서 윤락(淪落)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몇몇 남성 연구자들이 윤락의 ‘락’이 ‘즐거울 樂’인 줄 알았다고 고백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197쪽)

성매매 수요와 공급을 각각 성 구매 남성과 성 판매 여성에 대응하여 각 개인에 대한 규제를 통해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생각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성 판매 여성만을 겨냥한 ‘공급 차단’이 아니라 공급 주체인 성 산업(남성 문화) 자체를 명확히 가시화하는 것이다.(233쪽) 각자도생이 깊숙이 스며든 한국사회지만 유독 여성의 성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행위성은 공공의 적으로 비난받는다.(246쪽) 한편, 남성 구매자 처벌로만 성 산업을 축소할 수 있을까? 성 산업으로 돈을 버는 브로커들이 조장하는 수요와 공급이 가장 문제다.(312쪽)

특히 민가영은 동의와 강제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분석한다. 가출 청소년 패밀리의 일상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도출했는데, ‘피해자의 협력에 의존하는 비강압적 착취’가 그것이다. 착취와 협력은 서로 대립하는가? 협력이 있었다면 착취는 없는 것인가?(285쪽) 지금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국가 권력을 탈취하거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이들은 드물다. 우리는 단지, 안전한 하루를 바란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10대 여성의 성 판매가 가출 패밀리에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방식이라는 점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단하지 않다.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안 아프고, 안전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굶주림과 주거가 안정치 않은 이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욕심이다. 큰일 없이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일상은 구조와 개인, 동의와 강제, 폭력과 비폭력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일상에서 택일은 가능하지 않다. 가정 내 폭력이나 빈곤으로부터 탈출한 10대 여성들이 새로운 가족에서 가해자에게 ‘협력’하는 이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태원 참사로 문자와 메일이 쇄도한다. 긴 하루였다. “제2의 세월호, 여성들은 CPR을 할 줄 모른다,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 미국인이 많이 안 죽어서 다행, 원인을 찾기 어려울 것….” 여론이 폭발한다. 행정과 안전을 담당하는 이상민 장관의 말대로, 이태원 골목에 몰린 10만 인파 자체가 원인일까. 미리 예약하고 가게 안에서 안전한 파티를 즐기고 있던 이들 중, 피해자는 없다. 피해자 대부분은 이태원 거리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가게 밖의 사람들, 이 중에는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상경한 이들도 있다. 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는‘가게 안과 밖의 차이’ 아닐까.

일상이 과로와 폭력을 무릅쓰고 버텨야 하는 시간인지, 최소한의 안전과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여부는 구조에 달려 있다. 가출 패밀리에서 10대 여성을 괴롭히는 ‘아저씨’와 통치자들, 그들이 바로 구조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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