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롱부츠를 발견한 유족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번호 달린 소지품 860점에선 그날의 ‘참사 흔적’ 그대로
신발 256켤레도…스마트폰 한 대는 외로이 진동음 울려
한 짝밖에 남지 않은 검은색 하이힐(1-19), ‘HAPPY HALLOWEEN’(행복한 핼러윈)이 적힌 마법사 모자(4-27), 검은색 때로 얼룩진 흰색 미니스커트(6-17), 여성 두 명이 함께 찍은 ‘인생 네 컷’ 즉석사진(13-140).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에 분류번호가 달린 860점의 소지품이 지난달 29일 이별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 가족, 생존자들은 고통스러운 ‘그날의 기억’으로 괴로워했다.
오전 10시19분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장여진씨(21)는 체육관에 들어간 지 8분 만에 아버지와 함께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왔다. 가로 15㎝, 세로 20㎝ 크기의 가방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거 잡을 새 없어요. 그냥 손 놓으세요. 안 그러면 죽어요.” 참사 당일 장씨는 인파에 밀려 몸이 점점 뒤로 젖혀졌다. 옆 사람 충고에 따라 꼭 붙잡고 있던 가방에서 손을 뗐다. 이후 장씨의 몸 위에는 5~6명이 겹겹이 쌓였다.
누군가 “정신을 차리라”며 장씨에게 물을 뿌렸다. 골목에 있던 술집의 남는 공간으로 상반신을 빼 겨우 숨을 쉬며 버텼다. 장씨는 사고 발생 1시간 뒤인 오후 11시15분쯤 구조됐다. 왼쪽 다리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장씨는 “아직도 그날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 살아 나온 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흰색 운동화를 찾으러 온 조성호씨(32)는 자신 위에 있던 시신을 치우고 현장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함께 이태원에 갔던 친구 한 명도 구했다. 또 다른 친구 두 명은 정신을 잃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았다. 하지만 “정신 차려”라는 조씨의 말에 깨어나 구조됐다.
베트남 국적의 여성 A씨(22)도 분홍색 가방 한 점을 찾았다. A씨는 “현장에서 제 손을 잡고 몸을 올려준 사람이 있었다. 도와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희생자의 유품을 찾은 유족은 아연실색했다. 오후 1시40분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 바닥에 놓인 옷가지들을 둘러보던 여성 B씨는 검은색 웃옷을 발견한 뒤 “맨날 입던 거잖아”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B씨는 이내 체육관 구석에 놓인 검은색 롱부츠 한 켤레를 보고 손가락으로 신발을 가리켰다. B씨는 부츠를 들어 살펴보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신발과 회색 후드티셔츠를 찾은 후 티셔츠를 안고 운 여성, 사고 이후 심폐소생술로 살아났지만 의식이 없는 피해자의 형 등도 이날 체육관을 찾았다.
체육관 곳곳에는 드라큘라 망토,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 캐릭터 보라돌이 모양의 천 모자, 공룡 인형 모자 등 핼러윈 코스튬(특수 의상)도 있었다. ‘000 병장’이라고 매직팬으로 등 부분에 적힌 군인 방한 내피, 미국에서 발행한 파란색 여권, 주인 이름이 적힌 신용·체크카드 수십장 등 신분을 드러내는 유실물도 여럿 보였다. 스마트폰 한 대에서는 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체육관 왼편에는 피해자들의 신발 256켤레가 한데 모여 있었다. 이 중 한 짝만 남아 있는 게 66켤레였다. 발목 부위 길이가 40㎝를 넘는 하얀색 롱부츠 천 부분에는 신발로 밟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 짝은 하얀색, 다른 한 짝은 빨간색으로 얼룩진 운동화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문을 연 원효로 다목적실내체육관 유실물센터에는 가방 124점, 옷 258벌, 신발 256켤레, 전자제품 등 기타 156개 등 총 1.5t 무게의 860점의 유실물이 비치됐다. 유실물센터는 오는 6일 오후 6시까지 24시간 운영된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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