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롱부츠를 발견한 유족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윤기은 기자 2022. 11. 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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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이태원 유실물센터’도 한숨과 눈물
다시는 신을 수 없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 수거된 신발들이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유실물센터에 보관돼 있다. 참사 당시 참혹함을 보여주듯 밟힌 신발들이 흙먼지로 얼룩져 있다. 권도현 기자
번호 달린 소지품 860점에선 그날의 ‘참사 흔적’ 그대로
신발 256켤레도…스마트폰 한 대는 외로이 진동음 울려

한 짝밖에 남지 않은 검은색 하이힐(1-19), ‘HAPPY HALLOWEEN’(행복한 핼러윈)이 적힌 마법사 모자(4-27), 검은색 때로 얼룩진 흰색 미니스커트(6-17), 여성 두 명이 함께 찍은 ‘인생 네 컷’ 즉석사진(13-140).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에 분류번호가 달린 860점의 소지품이 지난달 29일 이별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 가족, 생존자들은 고통스러운 ‘그날의 기억’으로 괴로워했다.

오전 10시19분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장여진씨(21)는 체육관에 들어간 지 8분 만에 아버지와 함께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왔다. 가로 15㎝, 세로 20㎝ 크기의 가방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거 잡을 새 없어요. 그냥 손 놓으세요. 안 그러면 죽어요.” 참사 당일 장씨는 인파에 밀려 몸이 점점 뒤로 젖혀졌다. 옆 사람 충고에 따라 꼭 붙잡고 있던 가방에서 손을 뗐다. 이후 장씨의 몸 위에는 5~6명이 겹겹이 쌓였다.

누군가 “정신을 차리라”며 장씨에게 물을 뿌렸다. 골목에 있던 술집의 남는 공간으로 상반신을 빼 겨우 숨을 쉬며 버텼다. 장씨는 사고 발생 1시간 뒤인 오후 11시15분쯤 구조됐다. 왼쪽 다리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장씨는 “아직도 그날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 살아 나온 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흰색 운동화를 찾으러 온 조성호씨(32)는 자신 위에 있던 시신을 치우고 현장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함께 이태원에 갔던 친구 한 명도 구했다. 또 다른 친구 두 명은 정신을 잃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았다. 하지만 “정신 차려”라는 조씨의 말에 깨어나 구조됐다.

베트남 국적의 여성 A씨(22)도 분홍색 가방 한 점을 찾았다. A씨는 “현장에서 제 손을 잡고 몸을 올려준 사람이 있었다. 도와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희생자의 유품을 찾은 유족은 아연실색했다. 오후 1시40분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 바닥에 놓인 옷가지들을 둘러보던 여성 B씨는 검은색 웃옷을 발견한 뒤 “맨날 입던 거잖아”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B씨는 이내 체육관 구석에 놓인 검은색 롱부츠 한 켤레를 보고 손가락으로 신발을 가리켰다. B씨는 부츠를 들어 살펴보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신발과 회색 후드티셔츠를 찾은 후 티셔츠를 안고 운 여성, 사고 이후 심폐소생술로 살아났지만 의식이 없는 피해자의 형 등도 이날 체육관을 찾았다.

체육관 곳곳에는 드라큘라 망토,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 캐릭터 보라돌이 모양의 천 모자, 공룡 인형 모자 등 핼러윈 코스튬(특수 의상)도 있었다. ‘000 병장’이라고 매직팬으로 등 부분에 적힌 군인 방한 내피, 미국에서 발행한 파란색 여권, 주인 이름이 적힌 신용·체크카드 수십장 등 신분을 드러내는 유실물도 여럿 보였다. 스마트폰 한 대에서는 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체육관 왼편에는 피해자들의 신발 256켤레가 한데 모여 있었다. 이 중 한 짝만 남아 있는 게 66켤레였다. 발목 부위 길이가 40㎝를 넘는 하얀색 롱부츠 천 부분에는 신발로 밟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 짝은 하얀색, 다른 한 짝은 빨간색으로 얼룩진 운동화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문을 연 원효로 다목적실내체육관 유실물센터에는 가방 124점, 옷 258벌, 신발 256켤레, 전자제품 등 기타 156개 등 총 1.5t 무게의 860점의 유실물이 비치됐다. 유실물센터는 오는 6일 오후 6시까지 24시간 운영된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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