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에 ‘이토록 평범한 미래’ 펴낸 김연수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여 결과 도출해 그 지점에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 만일에 적극적으로 미래를 상상한다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이 있지 않을까 ‘비극의 비극’까지 가며 탐색해낸 결과물 팬데믹 이후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
유력한 용의자가 범죄심리학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직접 접촉을 시도한다는 내용의 소설 초고를 다시 꺼냈다. 초고는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의 사진집 ‘사랑의 방’ 가운데 자신이 방에 불을 지른 뒤 찍은 사진 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2003년 작성된 것이었다. 이 초고를 토대로 이전에도 작품을 써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올해 초,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쓰기 전 단계의 각종 메모나 글이 담긴 컴퓨터 폴더에서 다시 이 초고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은 지극히 평범했다. 너희가 말하는 건 다 틀렸어, 라고 범죄심리학자와 경찰의 눈을 속이고 빠져나가는 영리한 범죄자를 그린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써나가던 어느 순간 용의자가 갑자기 이상하고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정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겠어요?
원래는 동조하는 척하면서 얻을 건 얻고 줄 것은 주면서 범죄심리학자와 게임하는 듯한 설정이었는데,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이 담긴 것이겠지만, 용의자가 갑자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초 설정과 달라지면서 소설은 중간쯤에서 막혔다. 이거, 좀 이상한 쪽으로 가는데. 스스로 용의자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감 시간이 다가왔지만 마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이때 마감을 정상적으로 할 것으로 상정하고 오래전에 친구와 잡아놓은 약속 날짜가 다가왔다. 에라, 모르겠다.
지난 봄, 그는 마감을 앞뒀지만 친구와 약속대로 일단 제주도로 날아갔다. 곧 재일교포 출신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1937∼2011)이 설계 건축한 ‘수풍석(水風石) 뮤지엄’을 찾았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겉모습은 그냥 집이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바람의 박물관. 안에 들어가 있어도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논리의 파괴, 비논리의 논리…. 그는 비로소 소설의 결론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올해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으로 뽑힌 문제적 단편 ‘진주의 결말’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걸어 나왔다.
‘진주의 결말’은 범죄심리학자인 ‘나’가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에 불까지 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유력한 용의자 진주로부터 이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나와 삼십대 후반의 독신 여성 진주는 객관적 사실을 두고 팽팽한 해석과 논리 대결을 벌이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두고 첨예하게 맞선다. 숨진 아버지가 간암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살인 혐의가 벗겨지고 방화 혐의만 확정된 가운데, 진주는 사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어떤 결말은 변함없다면, 미래를 상상해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달이 있는 방향으로 더듬거리더라도 한 발짝씩 걸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78∼79쪽)
소설가 김연수가 ‘진주의 결말’을 포함해 여섯 번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2014년 쓴 두 작품에 코로나19 이후 풍경이 담긴 6편을 더해서 모두 8편이 담겼는데, 9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다.
등단 이래 2∼4년 간격으로 작품집을 발표, ‘다산의 작가’로 불려온 소설가 김연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들고 온 소설집에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달 26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진주의 결말’을 통해서 독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저 자신도 처음 진주의 결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웃음) 어떤 독자분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 자신이 진주라고 농담하면서 진주를 좋아한다고 말하더라. 답장을 보내면서 진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할 때에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지만, 남에게 이해받으려면 이유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 이유라는 게 바로 이야기라는 걸. 타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설명하면 이해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상태는 똑같은데도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에 따라서 이해와 불가해가 나뉜다는 것은 진정한 이해가 아니고 그냥 이야기만 이해한 것일 뿐이다. 진주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종말론이 득세하던 1999년 여름 동반 자살을 결심한 스물두 살의 두 대학생 ‘나’와 ‘지민’이 시간 여행을 다룬 책 ‘재와 먼지’를 접한 뒤 의외의 선택을 하는 작품이다. 출간 금지된 책 ‘재와 먼지’의 줄거리를 전해준 외삼촌은 동반 자살을 꿈꾸는 두 사람에게 말한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29쪽)
―소설 속 책 ‘재와 먼지’에는 과거로, 미래로 시간 여행하는 내용이 담겼는데.
“그냥 아이디어 차원에서 마치 임사체험처럼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미래가 정해져 있고 이것을 알고 있다면, 현재 행동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이전의 상황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 행동이 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9년 만에 소설집을 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40대 때에는 약간 비관에 갇혀 있었다. 이번 소설집은 비관의 비관까지 가본 뒤 탐색한 결과물 같은 것이다. (작품 세계관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라는 얘긴가) 그러지 않을까.”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난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이듬해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가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차례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등을,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곱 해의 마지막’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인터뷰가 의외로 길어지면서, 그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백팩을 맨 그는 건물 1층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자, 그는 서둘러 내달리기 시작했다. 용산역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달린다는 그의 말이 피어올랐다. 긴 비관의 비관의 시간 속에서도 이른 아침마다 글을 쓰고 또 고쳤을 그의 모습도. 그리하여 재탄생한 소설가 김연수에 대한 기대도.
청명한 하늘과 빛나는 구름을 보면서, 긴 비관의 비관의 끝에서 그가 건져 올린 것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미래를 기억한다면 현재를 더 잘 살아낼 수 있다는 철학을.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 있다는 신앙 같은 신념을. 비관의 강을 건너자 나타난 남은 인생을 ‘세컨드 윈드’의 바람으로 달려가리라는 자기 암시와 다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