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들어낸 쉼표 하나를 오후에 되살렸다
퇴고는 대개의 경우에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고치자면 무한정 고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느 정도 선에서 더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작품을 쓰는 일로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완성된’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오전 내내 시 교정지를 가지고 작업을 했지요. 그래서 쉼표 하나를 들어냈습니다. 오후에는 그걸 다시 살렸고요.”
“한시간 전부터 잘못 쓴 한 문장을 고치느라 진을 빼고 있다네. 그런데도 점심을 먹는 내내 그 문장이 다시 잘못된 것 같다는 후회가 밀려와 나를 괴롭히니 말이야.”
두 인용문은 문인들의 퇴고 작업이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까다로운지 알려준다. 시와 쉼표에 관한 언급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로 알려졌고, 문장에 관한 인용은 에밀 졸라 소설 <작품> 속 소설가 상도즈의 말이다.
퇴고는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다. 작가는 작품에 관해 자신이 들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퇴고 과정에서 다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 만큼 작가들은 퇴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인식을 실천에 옮긴다. 시적인 미문으로 유명한 소설가 윤대녕은 초고를 일단 거칠게 써놓은 뒤 시간을 들여 한 문장 한 문장 다듬어 나간다고 말한 바 있다. 정유정은 시놉시스에 가까운 초고를 한달음에 쓰고, 그 뒤 몇번에 걸쳐 새로운 버전으로 고쳐 쓰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오정희는 완성된 원고를 소리 내서 읽어 보고, 문장이 입에 착착 달라붙지 않으면 리듬감이 느껴질 때까지 고쳐 쓰고는 한다. 윤대녕이나 정유정, 오정희만이 아니라 많은 작가가 비슷하게 퇴고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다.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상허 이태준은 문장 작법서 <문장강화>에서 퇴고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문장의 성질은 고칠수록 좋아지는 그것이다. 같은 글이면 두번 고친 것보다는 세번 고친 것이 더 나을 것이요, 열번 고친 것보다는 열한번 고친 것이 또 나을 것이다. 이것은 문장의 법칙이라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파리 리뷰>의 작가 인터뷰집 <작가라서>의 한 장은 퇴고에 할애되었다. “첫 원고를 쓰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대개는 한자리에서 다 쓰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 이야기 하나당 원고를 20~30편 정도 써왔다”는 것은 레이먼드 카버의 대답이다.
‘초고란 뭐가 됐든 쓰레기’라는 금언은 헤밍웨이의 말로 알려져 있다. 초고는 완성작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며, 초고가 최종 원고가 되기까지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겠다. 헤밍웨이는 실제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경우 무려 47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시도해 본 끝에 지금의 마무리로 낙착을 보았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노인과 바다>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 역시 적게는 수십번에서 많게는 200번까지 고친 것으로 알려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퇴고를 다룬 부분이 있다. 하루키의 퇴고는 몇차례에 걸쳐 이어지는데, 각각의 퇴고 전 일주일에서 한달 정도는 원고를 서랍에 넣어 두고 그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는다는 고백이 주목된다. 원고와 시간적 거리를 둠으로써 그에 관해 객관적 시선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헤밍웨이나 하루키만 해도 퇴고의 ‘선수’들이라 할 법하지만, 이들조차도 범접하지 못할 퇴고의 대마왕이 있으니 오노레 드 발자크가 그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책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에 소개된바, 발자크의 퇴고는 교정쇄 읽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교정쇄 읽기는 대부분의 다른 작가들처럼 창작 과정보다 더 쉬운, 수정이나 뒷손질을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고쳐 쓰고 새로 창작하는 작업이었다. (…) 무엇보다도 종이가 크고 길어야 했다. 전지(全紙) 전체에, 인쇄된 부분이 카드의 으뜸패처럼 한가운데 들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왼편 오른편, 위아래에 네배, 여덟배의 공간이 수정을 위해 남겨져 있어야 했다.”
이렇게 초고보다 너른 공간을 빼곡하게 채워 가며 수정된 원고를 써넣을 뿐만 아니라, 교정쇄의 몇 단락을 가위로 자르고 새로 쓴 원고용지를 풀로 붙이는 작업이 더해진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교정쇄가 신문사나 인쇄소로 보내지면 발자크 스타일에 매우 숙달된 식자공들이 새로운 교정쇄를 만들어 작가에게 보내고, 발자크는 “처음과 똑같은 노여움에 사로잡혀 새로 인쇄된 텍스트에 달려”든다. 이런 작업이 대여섯번에서 일곱번까지 이어졌고, 적잖은 작품들은 열대여섯번까지도 이런 퇴고 과정을 거쳤다. 끝이 없어 보이는 그의 퇴고에 지친 어떤 신문 발행인이 작가의 마지막 교정 작업을 기다리지 않고 연재분을 게재하자 발자크는 그에게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된 ‘완성본’ 원고를 다시 고치는 경우도 있다. 최인훈은 <광장>을 무려 열번 정도 고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것과 같은 약간의 손질에서부터 결말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 대폭 개작까지 망라돼 있다. 조정래는 등단 50주년이던 2020년 대하소설 삼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개정판을 내놓았다. 작품의 전체 얼개를 바꾸지는 않고 문장과 표현을 손보는 퇴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떤 개작의 경우는 작품의 주제를 거의 정반대로 바꿈으로써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황석영의 중편 ‘객지’와 김성동의 장편 <만다라>가 그런 사례들이다.
1971년에 처음 발표된 ‘객지’는 공사판 떠돌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그 한계를 그리는데, 소설 결말은 파업을 주동했던 동혁이 동료들의 비겁과 배신을 지켜보면서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고 다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2000년 창작과비평사(현 창비)판 전집에 동혁이 자결하는 장면을 묘사한 한 문단을 덧붙였다가 2020년 문학동네판에서는 다시 이 대목을 삭제했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는 젊은 승려 법운의 구도행과 방황을 다루는데, 소설 말미에서 법운은 타락한 불가(佛家)를 버리고 속세로 들어간다. 그러나 작가가 2001년에 낸 개정판에서는 법운이 갈등 끝에 속세를 등지고 절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말이 뒤바뀐다.
개작의 사례는 시에서도 없지 않은데, 특히 유명한 것이 고은 시인의 경우다. 고은은 1993년에 시전집 증보판을 내면서 초기 시들을 크게 손보았다. 시인 자신의 오랜 고민을 담은 개작이라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 쪽에서는 개작한 결과보다 개작 이전의 ‘원본’이 더 낫다는 말도 없지 않았다. 1974년에 나온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에 실린 작품 ‘삶’이 대표적이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로 시작하는 이 12행짜리 시는 삶에 관한 관조적이며 초월적인 태도를 유려한 가락에 실어 노래한다. 그런데 1993년 개정증보판에서는 적잖은 변화가 눈에 뜨인다. 전체 분량이 15행으로 늘었고, 불교적 주제를 부연 설명하는 구절이 추가되면서 리듬감이 깨진 느낌이 든다. “비록 우리가 몇 가지 가진 것 없어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의 모습 바라볼 일이다”라는 도입부에서부터 그런 변화는 확연한데, 특히 마지막 부분의 변모가 두드러진다. 1974년 판본과 1993년 판본을 비교해서 읽어 보자.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다 가지겠는가./ 또 무엇을 생이지지(生而知之)로 안다 하겠는가./ 잎새 나서 지고 물도 차면 기우므로/ 우리도 그것들이 우리 따르듯 따라서/ 무정(無情)한 것 아닌 몸으로 살다 갈 일이다.”
이태준과 헤밍웨이가 강조했다시피, 퇴고는 대개의 경우에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고치자면 무한정 고칠 수도 있다. 창작은 아니지만 번역가 정영목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번역한 모든 책을 고쳐 내고 싶다며, “저한테 한정 없이 잡고 있으라면 한 책을 갖고 끝도 없이 고칠걸요?”라고 반문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느 정도 선에서 더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작품을 쓰는 일로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완성된’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작가들이 독자들 앞에 내놓는 결과물은 불가피하게 포기와 체념을 수반한 타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하겠다. <끝>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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